Film ·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 · 1993

세 가지 색: 블루 포스터

세 가지 색: 블루

Trois couleurs : Bleu


푸른 샹들리에의 빛이 새긴 그림자

「세 가지 색: 블루」는 자유를 다룬 영화로 분류된다. 삼색기의 첫 색이 자유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자유는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힘이 아니다. 사고로 남편과 딸을 한꺼번에 잃은 줄리에게 자유란, 자기를 붙들고 있는 모든 것을 끊어 내고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남는 일이다. 그녀는 기억을 버리고, 집을 비우고, 이름을 지운다.

영화의 한가운데에는 딸 안나의 방에서 가져온 파란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그 하나가 방을 파란빛으로 채우면서, 동시에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를 함께 드리운다. 영화는 자유라 불리는 그 텅 빈 자리가 실은 빛이 아닌 그림자의 서늘함이 만든 공간임을 줄리보다 먼저 알고 있다.

잃는 자유

줄리의 자유는 얻는 자유가 아니라 잃는 자유다. 남편이 남긴 미완성 협주곡의 악보가 쓰레기차에 통째로 삼켜질 때, 그녀가 버리는 것은 악보만이 아니다. 과거와 사랑을, 자신이 누구였는지까지 함께 폐기하는 셈이다. 삼키다 만 한 움큼의 알약도, 돌벽에 문질러 깬 손등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무언가를 느끼는 능력 자체를 스스로 마비시키려 한다. 커피에 각설탕이 천천히 젖어 드는 몇 초를 골똘히 바라볼 때, 그녀가 하는 일은 세계를 견딜 만한 크기로 좁히는 것이다.

영화는 이 상태를 파랑으로 물들인다. 다만 그 파랑은 한 겹이 아니다. 하늘과 유리를 통과하는 빛의 파랑은 가볍고 트여 있는데, 줄리를 감싸는 파랑은 다르게 움직인다. 기억이 밀려들 때마다 화면은 파란빛에 통째로 잠겼다 떠오르고, 그녀가 홀로 몸을 담그는 수영장의 물빛도 같은 색이다. 그 물은 바깥을 모두 차단한 채 원점으로 돌아가는 자리처럼 보인다. 세상의 파랑이 자유라면, 그녀의 파랑은 그 자유가 곧 침수였다는 뜻이다.

시선, 그리고 긴장

이 영화의 진짜 긴장은 사건이 아니라 시선에서 나온다. 카메라는 늘 무언가를 반쯤 가리거나 엿보는 자리에 놓이고, 그 바라봄마다 팽팽한 긴장이 얹힌다. 병실 창을 깬 줄리가 알약을 삼키려는 순간에는 간호사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는 조마조마함이 흐르고, 바람에 창이 두들기고 문이 잠겨 버리는 밤에는 누군가 들어온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 깔린다. 매춘이 얽힌 정사를 훔쳐보는 눈에는 들킬지 모른다는 긴장이, 병 하나를 재활용 통에 넣지 못해 애쓰는 굽은 노파에게는 끝내 넣을 수 있을까 하는 아슬아슬함이 붙는다. 파트리스의 정부를 멀리서 지켜볼 때조차, 줄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예감이 화면을 죈다.

이 관찰의 긴장을 겪는 것은 관객만이 아니다. 줄리 자신이 세상을 그렇게, 닿지 않는 거리에서 지켜본다. 굽은 노파를 바라보면서도 손을 내밀지 않고, 다정하게 차에 오르는 중년 부부를 지켜보다 말없이 자리를 뜬다. 온전히 이어져 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녀는 물러선다. 보되 결코 닿지 않으려는 그 거리가, 그녀가 세운 자유의 실제 모습이다. 그것은 해방이라기보다 격리에 가깝다.

붙잡고 있어야 한다

줄리의 기획에는 결함이 하나 있다. 자기를 지우는 일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벽장에서 어미 쥐가 갓 태어난 새끼들과 함께 나오자 그녀는 무너진다. 밤에 그 울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는, 사랑이란 덫일 뿐이라고 되뇐다. 그러나 그 말은 그녀가 이미 덫에 걸려 있다는 자백에 가깝다. 끝내 고양이를 빌려 그 자리에 들이는 장면에서, 사고를 당했던 사람은 이번에는 사고를 내는 쪽에 선다. 다만 그 죽음은 우연이 아니다. 죽은 딸과 겹쳐 오는 그 장면과 연이어 어린 아이들이 수영장에 들어오는 장면은 그녀가 도망치려던 모성을 정면에서 되비춘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찾아가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줄리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텔레비전 속에서는 사람들이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번지점프가 흘러간다. 둘 다 놓아 버림을 건드리지만, 어느 쪽도 끝까지 놓지는 못한다. 줄리 역시 그렇다.

거리의 악사는 배운 적 없다는 리코더로 파트리스의 협주곡을 그대로 분다. 잠든 그를 살피는 줄리에게 악사가 건네는 말이 이 영화의 급소를 찌른다. Tu dois toujours tenir sur quelque chose. 사람은 늘 무언가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잠언이다. 그런데 어떤 한국어 자막은 이 말을 당신은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군요라는 그녀를 향한 진단으로 옮겼고, 줄리에게는 그 오역마저 사실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다던 그녀가 유일하게 버리지 못한 안나의 샹들리에가 그 말이 옳다는 조용한 증거로 남는다.

그림자

그러니 줄리의 마지막은 승리가 아니다. 그녀는 슬픔을 이겨 내지 못한다. 다만 벗어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돌아설 뿐이다. 남편의 아이를 밴 정부 샌드린에게 집을 내주고, 없애려던 협주곡을 올리비에와 함께 완성하는 일은 그 수용의 다른 얼굴이다. 이 곡은 당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올리비에의 말과 함께, 죽은 남편의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그녀가 처음으로 제 이름으로 무언가를 짓는다. 완성된 악보는 그의 오선 위에 그녀의 손으로 찍은 잉크가 파랗게 덧쓴 자리다. 지우려던 파랑이 이을 파랑이 된다.

아무것도 붙잡지 않으려던 사람이 끝내 완성해 내는 것이, 혼자서는 지을 수 없는 노래라는 점에 이 영화의 짓궂음이 있다. 노래가 흐르는 동안 화면은 그녀가 얽혀 있던 얼굴들을 차례로 스쳐 간다. 십자가 목걸이를 돌려주러 온 소년, 그녀가 홀로 내치지 않은 창녀, 파트리스의 아들을 밴 정부의 배 속에 파랗게 떠오른 초음파, 유리 너머 올리비에의 품에 안긴 그녀 자신이 잇따라 지나간다. 아무와도 이어지지 않으려던 여자가 실은 이 모든 저마다의 삶에 샹들리에의 크리스탈들처럼 이미 묶여 있었다는 사실이, 한 번에 펼쳐진다.

마지막에 줄리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한 편 내내 마비돼 있던 감각이 돌아오는 순간이다. 그녀가 얻은 자유는 고통을 이겨서가 아니라 그 고통을 끝내 받아들여서 온다.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고 새겨진다. 자유란 그 새겨진 그림자를 안고 살기로 하는 일이고, 오직 그 길만 출구로 남겨 둔 자리에서 이 영화는 아름다운 동시에 잔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