ÉGALITÉ · 균형을 맞추다

세 가지 색: 화이트

TROIS COULEURS : BLANC · 1994 ·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

「화이트」(1994) 포스터 — 창백한 흰빛의 카롤과 도미니크

2프랑의 무게만큼 기운 저울

출연
즈비그니에프 자마호프스키 · 줄리 델피
감독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
2026.08.13

저울은 정직하다. 한쪽이 무거워지면 반대쪽이 그만큼 들린다. 다시 수평으로 만들려면 무거운 쪽을 덜어 내거나, 가벼운 쪽에 그만큼을 얹어야 한다.

「세 가지 색: 화이트」의 카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이 저울처럼 다룬다. 프랑스인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밑바닥까지 기운 삶을, 그는 아내를 제 높이로 끌어내려서라도 되돌려 놓으려 한다.

기울어진 천칭

이 저울은 처음부터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다. 파리에서 카롤은 아무 힘이 없다. 남의 나라에 얹혀 사는 이민자에게는 기댈 제도도, 편들어 줄 말도 없다. 무게는 온통 도미니크 쪽에, 프랑스 쪽에 실려 있다. 재판이 끝나고 그의 손에 남은 것이라곤 빗 하나와 2프랑짜리 동전 하나뿐이다.

그가 이 기울기를 뒤집는 곳은 제 나라 폴란드다. 이제 막 무엇이든 사고파는 나라로 돌아온 그는 눈치와 배짱으로 땅을 굴려 순식간에 부자가 된다. 돈이 생기자 그는 도미니크를 다시 제 쪽으로 끌어올 판을 짜기 시작한다. 그렇게 파리에서 그가 겪은 일이 이번에는 그녀에게 되돌아온다.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아무 힘도 못 쓴 채 제도에 갇히는 처지가, 이번엔 도미니크 몫이다.

화이트

카롤이 처음 겪은 그 불균형을, 영화는 흰색으로 칠한다. 제목이 가리키는 흰색은 깨끗하지 않다. 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부터 그 색이 그를 따라다닌다. 가장 먼저 그를 건드리는 건 비둘기의 배설물이다. 법정으로 걸어가던 그의 어깨 위로, 하늘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떨어진다.

그 뒤로도 흰색이 계속 쌓인다. 폴란드의 눈, 화면을 창백하게 식히는 겨울빛, 그가 자꾸 떠올리는 결혼식의 흰 드레스가 그 위에 겹친다. 흰색은 모욕에서 냉기로, 냉기에서 놓지 못한 기억으로 옮겨 다닌다.

그러다 폴란드의 어느 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몸을 섞을 때 화면이 통째로 하얗게 타오른다. 처음에 위에서 그를 더럽히던 흰색이, 이번에는 그의 몸 안에서 터져 나온다.

똥이든 정액이든 몸이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래서 그의 가장 큰 승리마저 그를 덮치던 모욕과 똑같은 색을 뒤집어쓴다. 바뀐 것은 방향뿐이다. 흰색이 어느 쪽으로 흐르느냐가 곧 누가 위에 섰느냐를 말한다.

시소

그 밤은 카롤이 폴란드에서 판을 완전히 뒤집고 난 다음에야 찾아온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저울을 평평하게 되돌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저울을 제 쪽으로 넘겨야 만족한다.

그 마음이 자꾸 사람을 상자에 가두는 모양으로 나타난다. 폴란드로 돌아올 때 그는 여행 가방 안에 짐짝처럼 실려 국경을 넘는다. 가방을 통째로 도둑맞고, 안에서 사람이 나오자 도둑들에게 두들겨 맞아 눈밭에 버려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도미니크가 감옥에 갇힌다. 상자에 담겨 실려 다니던 그가 이제는 남을 상자에 넣는 쪽이 되어 있다.

파리에서 되지 않던 일이 여기서 되는 이유는 하나다. 그는 힘을 손에 쥔 뒤에야 그녀를 안는다.

그렇게 무게를 자기 쪽으로 다 옮겨 놓았을 때 비로소 두 접시가 수평을 이룬다. 하지만 그건 가운데서 만나 이룬 균형이 아니다. 그는 그녀를 자기가 있던 자리, 말도 안 통하는 남의 나라에 갇힌 처지까지 끌어내려서 숫자를 억지로 맞춘다. 그 셈은 오직 그의 장부 안에서만 성립한다. 바깥에서 보면 한 여자의 삶을 부순 남자가 있다. 이 영화에서 평등이란 이긴 쪽이 제 승리에 붙이는 이름일 뿐이다.

두 번째 삶

이 영화에는 죽음을 지나 돌아오는 남자가 둘 있다. 한 사람은 카롤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를 다시 폴란드 땅에 데려다 놓은 친구 미콜라이다. 미콜라이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 죽고 싶어 한다. 그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 하나를 대신 쏴 달라고 카롤에게 부탁하는데, 알고 보면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이다. 카롤이 쏜 첫 발은 공포탄이었다. 총구 앞에서 죽음을 한 번 겪고 난 그는 그제야 살기로 마음을 바꾼다.

카롤도 한 번 죽는다. 다만 그의 죽음은 스스로 꾸며 낸 것이고, 그가 되찾은 삶은 오직 복수에 쓰인다. 미콜라이는 죽음의 문턱에서 삶 쪽으로 돌아섰다. 카롤은 제 장례까지 치르고도 저울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롤은 감옥 앞에 서 있다. 망원경으로 도미니크의 감방 창을 올려다본다. 유리 안에서 그녀는 풀려나면 다시 결혼하자고 손짓한다. 그리고 그는 운다.

그는 원하던 것을 다 손에 넣었다. 그런데 그 끝에 남은 것이 정말 사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그는 상대를 감옥에 가두고 나서야 겨우 그녀를 되찾았다. 그는 제 딴에는 분명히 이겼다. 그 눈물은 그가 맞춰 놓은 저울에 스스로 낸 금 같다. 오직 그의 해석으로만 승리인 그 자리에서, 정작 그 해석마저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