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감정을 더 깊은 우울로 잠식시키고 싶을 때가 있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가 망망대해에서 고독해지면서 겸허해지며 느끼는 감정이랄까. 나라는 존재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세상 속에서 한 점처럼 느껴질 때 스며드는 위로가 있다.
열꽃은 그런 앨범이다. 헤아릴 수 없는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아린 감정이다. 한겨울 눈밭의 열감이 느껴진다.
차가운 위로가 스며든다.
잠식
사람은 참 간사하다. 타인의 고통이 위로가 되다니.
「집」을 들으며 느낀 묘한 고양감은 당신의 슬픔보다 내 슬픔이 얕아서였을까.
그로부터 오는 안도감일까.
얕은 물밑으로부터 깊은 심연까지.
내 감정이 어느 극단까지 치우칠 수 있는지 보고 싶은 것처럼
저 너머에서 세이렌의 노래가 들려온다.
가라앉는다.
해열
바닥에서 숨을 잃어가는 사람에게 주마등이 흐른다.
「출처」와 「Dear TV」가 그렇게 들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그저 무력하게 밀려든다.
도화선을 지폈던 자리들이 하나 둘 씩 스쳐 지나간다.
헤엄치지 않는다.
몸에서 힘을 빼면, 잠겨 있던 몸이, 얼굴이 저 혼자 떠오른다.
삶은 어쩌면 발버둥이 아니라, 힘을 빼는 곳에서 오나보다.
「해열」의 열은 놓아버려서 내린다.
봄
떠오른 후에야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내일은 오늘의 태양을 띄운 채 자리잡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가라앉았던 자리 위로.
문턱을 넘나들어도 되는 사람들이
숨이 필요한 몸에 숨을 불어넣는다.
그 숨으로 열꽃이 핀다.
눈밭에 번지는 선홍 한 점,
봄이다.
그러니 열꽃은 앓아서 핀 꽃이 아니다.
가라앉았다가, 떠오른 생채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