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발매한 최고의 앨범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앨범을 고른다. 15~16년 전, 중학생이던 나는 삼성 Yepp MP3에 문화상품권으로 앨범 음원을 사서 다 넣었고, 질릴 새도 없을 정도로 반복해서 들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도 문득, 언젠가 내가 알게 되거나 겪은 것들을 글로 남기게 된다면 이 앨범을 꼭 들어보라고 적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이 글을 누가 읽을진 모르겠으나, 이 앨범을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봐 달라고 말하고 싶다.
이 앨범은 나에게 센세이셔널했다. 하나의 서사로 짜인 앨범을 거의 처음 만나서였는지도 모른다. 한 장의 앨범 안에서 이렇게도 다른 장르의 곡들이 공존할 수 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드의 색은 흐트러지지 않고 서로 맞물려 나를 붙들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오래 남는 음악에는 두 종류가 있다.
가사를 몰라도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음악
가사를 읽었을 때 그 감정이 더 증폭되는 음악
이 앨범은 그 둘을 모두 충족시킨다.
섬광
가사를 이해하고 듣기 전부터, 이 앨범은 중간에 멈출 수 없을 만큼 나를 사로잡았다. 곡과 곡 사이를 짧은 간주가 이어 주는 부분이 많은데, 이 트랙들이 앨범 전체를 한 편처럼 유기적으로 흐르게 한다. 그래서 가사를 모르고 들어도 어떤 공감각이 일거나 장면이 아득히 떠오르곤 했다.
「Empty Spaces」에는 아예 가사가 없다. 풀벌레 소리 밑에 폭음과 사람들의 웅성거림만 깔릴 뿐인데, 나는 잿더미가 된 벌판의 전쟁 장면을 떠올렸다. 이 곡이 비틀즈의 「Revolution 9」과 똑같은 샘플을 가져다 썼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는데, 그걸 모르던 때도 그 장면은 그대로 그려졌다.
持ち上げて、解き放して
「Jornada del Muerto」에는 곡 내내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가 나온다. 이 말 뜻을 몰라도,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놓아 버리는 일렁임만은 그대로 전해졌다.
앨범은 한 줄기로 흐르면서도 매 순간 전혀 다른 빛깔로 갈라진다. 부족 타악과 랩으로 몰아치다가 성가처럼 잦아들고, 「Blackout」은 한 곡 안에서 분노와 부유를 오간다. 이렇게 널을 뛰는데도 밴드의 색은 흐트러지지 않고, 오히려 그 낙차가 앨범을 더 생생하게 만든다. 린킨파크가 이전 앨범들보다 얼마나 다양하고 과감한 시도를 했는지가 트랙마다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래서 호불호가 크게 갈린다고들 하는데, 나에게는 그 모험이 하나같이 좋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에도 나는 이 소리들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다.
재
가사를 펼쳐 놓고 다시 들으면 같은 곡도 다르게 들렸다. 가장 아끼는 「Burning in the Skies」는 스스로 태워 버린 다리에서 난 연기 속을 헤엄치며, 그 잘못이 오롯이 자기 몫이라고 되뇐다. 처음에는 틀어진 연인 사이를 노래하는 곡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제 손으로 불을 지르고 그 재를 뒤집어쓴 사람의 뉘우침으로도 읽혔다. 어느 쪽으로 들어도 다 맞았다.
이 앨범은 곳곳에 진짜 목소리도 심어 두었다. 「The Radiance」에는 원자폭탄을 만든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 실험을 돌아보며 이제 내가 죽음이 되었다고 읊는 실제 육성이 흐른다. 「Wisdom, Justice, and Love」에는 마틴 루터 킹의 반전 연설을, 「Wretches and Kings」에는 1964년 버클리 광장에서 마리오 사비오가 기계에 몸을 던지라고 외친 대목을 그대로 얹었다. 지어낸 대사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의 말이다. 이런 걸 하나씩 알아챌 때마다, 혼자만의 넋두리인 줄 알았던 노래가 갑자기 거대한 역사와 맞닿았다.
여백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앨범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종말이나 전쟁, 핵 같은 거대한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느끼는 감정까지 그 위에 슬쩍 얹어 두는 게 아닐까. 「Robot Boy」가 버티라며 말하는 세상의 무게는 지구를 짓누르다가도 어느새 한 사람의 가슴팍으로 좁아진다. 「Waiting for the End」가 기다리는 마지막이 세상의 종말인지 한 사람과의 이별인지 도무지 가려지지 않는다.
이렇게 여러 갈래로 들리는 데는 까닭이 있다. 이 앨범의 노래들은 정작 중요한 대목을 비워 둔다. 무엇을 놓으라는 건지도 일러 주지 않고, 갑옷을 두른 사람에게 버티라고 손 내미는 목소리가 신인지, 곁의 누구인지, 아니면 나 자신인지도 좀처럼 밝히지 않는다. 가사를 아무리 뒤져도 그녀나 그가 없다. 내가 알기로 린킨파크는 노랫말에 'He'나 'She' 같은 단어를 잘 쓰지 않는다. (새 보컬 에밀리 암스트롱이 밴드의 새 출발을 알리는 무대를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그런 단어가 없던 덕분에 가사는 그대로 두고 곡의 키만 바꿔 부를 수 있었다고 한 걸 본 기억이 있다.) 그래서 어느 자리에 누구를 앉혀 봐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 여백은 듣는 사람 모두에게 열려 있어서, 이 앨범은 누가 들어도 그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전언
이 모든 굉음이 다 지나간 자리에, 앨범은 마지막으로 단 한 사람만 남겨 둔다. 「The Messenger」에서는 전자음도 샘플도 프로그래밍도 뒤로 물러나고, 통기타 한 대와 체스터의 목소리만 부각된다. 그 목소리로 그는 아주 단순한 말을 건넨다. 삶이 우리 눈을 멀게 할 때, 사랑이 우리를 다정하게 지켜 준다고. 종말을 그토록 노래하고도 앨범이 맨 끝에 남기는 말은 사랑이었다. 갈라지다 넘쳐 버리는 그 목소리를, 체스터 배닝턴 말고 누가 그렇게 부를 수 있었을까. 세상을 다 태운 섬광도 이 목소리와 말만은 지우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앨범은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다. 종말을 그리든 사랑을 말하든, 그 아래 흐르는 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가사를 몰라도 무언가 차오르고, 알고 나면 그게 한 번 더 커진다. 이 노래들 앞에서는 누구에게나 그 일이 똑같이 일어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