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TERNITÉ · 서로에게 닿다

세 가지 색: 레드

TROIS COULEURS : ROUGE · 1994 ·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

덧대어진 저마다의 붉은 색들

「레드」(1994) 포스터 — 붉은 배경 속 노판사와 발렌틴
출연
이렌 야콥 · 장루이 트랭티냥
감독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
2026.08.14

카메라 앞에서 발렌틴은 슬픈 표정을 짓는다. 붉은 천을 배경으로 세워 두고 사진사가 그렇게 주문했기 때문이다. 곧 그 얼굴은 제네바 거리를 덮는 거대한 껌 광고가 된다. 「세 가지 색: 레드」는 누군가 만들어 세운 얼굴, 누군가 멀리서 지켜보는 얼굴로 막을 연다.

정작 발렌틴은 광고 속 그 표정과 닮지 않았다. 남을 쉽게 살피고 쉽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다. 영화는 그 손짓을 오래 따라간다. 그리고 내내 한 가지를 묻는다. 서로 모르던 삶은 어떻게 닿는가.

레드

이 영화의 붉음은 뜻을 앞세우는 상징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로 자꾸 끼어드는 색이다. 마주 앉는 카페의 벽, 나란히 앉는 극장의 좌석,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을 멈춰 세우는 신호등. 붉음은 늘 여러 사람들 사이의 거리에 놓여져 있다.

발렌틴의 주위에는 붉은 색이 많다. 그녀가 입던 옷, 그녀가 쓰던 다이어리, 심지어 그녀가 던진 볼링공도 말이다. 붉은 색이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자주 놓여도, 그 거리가 실제로 좁혀지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가까워지는 두 사람은, 원래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타인의 삶

발렌틴과 케른이 처음 얽히는 계기는 일반적이진 않았다. 발렌틴이 차로 친 개의 주인이 하필 그였다. 사람을 만나는 대신 이웃들의 전화를 몰래 엿듣는 은퇴한 판사다. 자기 인생은 접어 둔 채 남의 삶 속에 들어앉아 사는 사람이다. 오래전 무언가에 데인 뒤로 그는 사람을 끊었지만, 사람이 그리운 것까지 끊지는 못했다. 닿지 않으면서 곁을 엿듣는 일이, 그가 스스로에게 남겨 둔 마지막 연결이다.

그렇게 남을 들여다보면서도, 케른은 자기가 어느 편이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오래전 무죄로 풀어 준 선원이 사실은 유죄였음을 뒤늦게 알고부터, 진실을 가려내는 일 자체가 그에게는 염치없는 짓이 되었다. 그 처지였다면 자기도 훔치고 죽였을 거라고, 다만 자기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 뿐이라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나쁜 건 아니라고 발렌틴은 대답한다. 냉소를 오래 두른 사람에게 건넨 그 말이, 케른을 조금씩 사람 쪽으로 되돌린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도청을 고백한다. 그런 그를 지켜보다 보면, 케른이 살아온 길이 실은 다른 데서 한 번 더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두 판사

그 흐름의 이름은 어거스트다. 케른을 한 번도 만나지 않는 젊은 판사 지망생인데, 두 사람의 삶은 한 세대를 사이에 두고 같은 자리를 밟는다. 어거스트는 사랑하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있는 것을 창 너머로 보고, 케른도 오래전 같은 배신을 겪었다. 둘 다 그 상처를 지나 법복을 입는다.

케른의 만년필은 잉크가 말라 버렸고, 어거스트는 새 만년필을 받는다. 늙은 판사가 다 써 버린 무언가가 젊은 쪽에서 다시 채워진다. 서로를 모른 채, 두 사람은 한 사람의 두 시절처럼 겹친다. 같은 자리를 밟는 둘을 보고 있으면, 늙은 쪽이 놓친 것을 젊은 쪽은 이번엔 놓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그 두 번째 시절이 어디로 향할지는, 발렌틴 쪽에서 먼저 어렴풋이 보인다.

풍선껌

그 미래를 먼저 본 것은 케른이다. 발렌틴이 오십쯤 되어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행복한 모습을, 그는 꿈에서 봤다고 한다. 정작 발렌틴과 어거스트는 같은 거리, 같은 카페를 지나면서도 끝내 스치기만 한다. 아직 서로에게 닿지 않은 두 사람의 훗날을, 영화는 늙은 판사의 꿈으로 앞당겨 보여 준다.

앞당겨 적힌 미래는 하나 더 있다. 발렌틴의 얼굴이 걸린 껌 광고다. 붉은 배경 앞에 세워 슬프게 지으라던 그 얼굴에, 문구 한 줄이 붙어 있다.

En toute circonstance,
Fraîcheur de vivre

어떤 처지에서도 삶은 싱그럽다는 말인데, 껌 한 통에 얹기엔 꽤 거창하다.

그 거창한 말을 시험하듯, 영화는 발렌틴을 폭풍 속 바다로 데려간다. 케른의 권유로 오른 페리가 해협에서 가라앉는다. 천사백여 명이 죽고, 일곱이 산다. 하필 그 일곱 안에 서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세 편의 사람들이 함께 들어 있다. 파란빛과 흰빛과 붉은빛이 각자의 화면에만 갇혀 있다가, 배 한 척이 가라앉는 우연 앞에서 비로소 한 물 위에 놓인다. 그중 하나는 그 어느 이야기와도 무관한 타인이다. 구원은 주인공만 골라 오지 않는다. 서로를 모르는 채로도 이미 얽혀 있던 삶들을, 영화는 재난까지 빌려 겨우 한 화면에 모은다.

살아남은 발렌틴의 얼굴이 뉴스 화면에 멈춰 선다. 붉은 배경 앞에서 슬프게 짓던 그 광고 속 포즈 그대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그라들지 않는 생기라던 광고 문구가, 재난의 한복판에서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다.

엮다, 엮이다

하지만 뉴스가 멈춰 세운 그 얼굴은 사진사가 주문해 만든 표정일 뿐이다. 정작 발렌틴은 일상에서 늘 웃는 낯을 하고 있다. 이 영화가 오래 붙드는 것도 페리가 가라앉는 그런 큰 사건이 아니라, 그렇게 웃으며 건네는 사소한 손짓이다. 언젠가 발렌틴은 병 하나를 재활용 통에 넣지 못하는 노인에게 다가가, 대신 그 병을 넣어 준다. 대단할 것 없는 손이다.

발렌틴이 하는 일에는 늘 대가도 이유도 없다. 다친 짐승이든, 마음을 닫은 노인이든,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든, 곁에 있으면 그냥 손이 간다. 그런데 그 아무 뜻 없는 손이 우연과 겹칠 때, 없던 인연이 새로 엮인다. 차로 친 개를 따라가 케른을 만나고, 그가 권한 배에서 살아남아 끝내 어거스트와 한 화면에 놓인다. 이 영화가 처음부터 오래 지켜본 것은 그 대가 없는 다정함이다. 누구를 특별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그렇게 대하는 마음이다. 거기에 크고 추상적인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 그것은 그저 발렌틴이라는 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