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 2025

어쩔 수가 없다

박찬욱 감독

보랏빛 꿈을 꾼 잿빛 낯빛.

어쩔 수가 없다
3.5 / 5.0
이병헌 · 손예진 · 이성민 · 차승원 · 박희순 · 염혜란
2026 · 05 · 23

「就活狂想曲(Recruit Rhapsody)」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가면을 쓰고, 그 가면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어쩔 수가 없다」를 보는 내내 그 애니메이션이 자꾸 겹쳐 떠올랐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작중 주인공 ‘만수’는 가면 속에 자신을 밀어 넣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순수한 열정만 남은 사람에 가까웠다.

갈 곳 잃은 열정

문제는 그 열정이 놓인 자리다. 사회라는 틀의 시스템 — 가끔은 부조리하고, 가끔은 능력이 아니라 운이나 정치 따위에 의해 좌우되는 그 시스템에, 만수는 끝내 자신을 끼워 넣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취업에 실패한다.

하지만 열정은 그대로 남아 있고, 지켜야 할 자식도 있다. 갈 곳을 잃은 그 열정은 결국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되어 — 살인에 이른다.

보라는 유혈의 선홍빛과 우울의 푸른빛이 섞여 만들어지는 색이자, 아이러니하게 ‘보랏빛 미래’를 설명하는 색이기도 하다. 다만 그 색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은, 조금도 아름답지 못했다.

종이와 거름

만수는 종이를 만드는 사람이다. 나무에서 온 것을 손에 쥐고 사는, 그러면서도 지독하게 위선적인 주인공이 이 영화를 끌고 간다. 화면은 내내 아름답고, 그 아름다운 미술이 오히려 이야기의 찜찜함을 배가시킨다.

만수는 창조주가 아니다. 그런데도 피조물 — 그가 지운 나머지 세 사람 — 을 흙으로 돌려보낸다. 온갖 생명의 거름을 만든다. 죽음이 다시 거름이 되고, 그 거름이 또 다른 생명을 키우는 순환. 그 고리 안에서 그의 생업은 어딘가 매장(埋葬)과 닮아 있다.

피만 없을 뿐

같은 프롤레타리아들끼리 로봇으로 대체되어 가는 사회에서 서로를 밀어낸다. 만수는 분명 살인을 저지른다. 그런데 그것을 ‘어쩔 수 없는’, 당위에 가까운 행동으로 — 적어도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 스스로 납득한다. 바로 그 지점이 현실적이고, 씁쓸했다.

어쩌면 너무 현실적이라, 나는 이 영화에 4점 이상을 주지 못했다. 볼 만한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불편하고, 폭력적이라는 느낌이 끝까지 남았다.

현대 사회, 특히 대한민국, 특히 AI로 대체되어 가는 이 시대와 겹쳐 보면 — 만수와 우리의 차이는 결국 물리적인 피가 있느냐 없느냐, 그 하나뿐인지도 모른다. 물론 실제로도 유혈사태는 뉴스에 오른다. 하지만 그런 예외를 빼고 보더라도, 저마다의 삶을 지고 있는 우리 모두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디멘터를 하나씩 달고 사는 게 아닐까. 다만, 피가 흐르지 않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