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 2026 ·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DIGGER
디거

우로보로스의 메타모르포제
커튼이 갈라진다. 벽마다 사냥한 짐승의 머리가 걸려 있고 그 사이사이에 골동품 총이 끼어 있는데, 그 방에서 숨이 붙어 있는 짐승은 반쯤 죽은 고양이 하나뿐이다. 쪼글쪼글한 디거 록웰이 새끼손톱 끝에 사료를 묻혀 그 고양이에게 내밀고, 한 입만 먹어 보라고 어른다. 그는 창 앞에 서서 바다를 본다. 해가 뜨고 물결이 잔잔하다. 돌아서면 침대가 고양이 오줌에 젖어 있다.
그 아침에 그린란드 시추 시설에서 얼음이 갈라졌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시추 책임자가 보낸 경고 메일이 마흔두 건 넘게 쌓여 있었다. 메탄가스가 팽창한다는 내용이었고 그는 한 통도 열지 않았다. 떨어져 나온 빙붕이 유럽으로 흘러가고, 과학자들이 그 얼음을 주디(Judy)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그 얼음을 멈추러 나선다.
샤막
가네시 박사가 충돌 예상일을 브리핑한다. 주디는 사흘 안에 노르웨이를 들이받고, 그러면 북해 전역에 해일이 올 것이라고 한다. 대통령 보좌진은 그 경고를 두고 그의 출신을 들먹인다. 회의실에서는 빙산에 핵을 쏘자는 말이 나오고, 부통령 에디는 커피머신 앞에서 공황에 빠진다. 그 방에서 주디를 멈출 수 있는 또렷한 방법은 나오지 않는다.
대통령과 디거가 대화를 하는 도중, 한참 뒤에 정원의 나무가 넘어진다. 풀밭 아래에서 무대 스태프의 손이 올라와 그 나무를 다시 세우려 하고, 곧 바닥을 뚫고 사람들이 하나씩 나타난다. 지금까지 본 종말은 무대 위에서 돌아가던 리허설이었다.
그 연극을 「화석 바보들(Fossil Fools)」이라고 부른다. 이 영화 안에서 디거 록웰은 지어낸 인물이 아니다. 살았던 사람이고 그가 일으킨 재난도 일어난 일이고, 연극은 그 일을 소재로 썼다. 25년이 넘었다. 지금까지 화면에 있던 사람은 디거를 연기하는 배우 커티스 마커슨이다.
영화는 그 재난을 무대라고 알려 주지 않고 찍는다. 그래서 앞부분은 재난의 기록으로도 보이고 연극의 리허설로도 보인다. 나무 한 그루가 넘어지기 전까지 둘이 구분되지 않았다. 막은 그 구분 하나만 가렸다. 재난도 소도구도 이음매도 가리지 않았고, 보는 쪽이 어느 편에 앉았는지만 잠깐 비워 두었다. 드레스 리허설을 마치고 나면, 이 무대의 재난을 보기 위해 관객들은 표를 끊어야 한다.
영화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유럽의회 방청석에 마네킹과 모형이 사람들 사이에 그냥 앉아 있다. 포스터에서 그가 등지고 선 바다는 나무 패널에 칠한 그림이고, 널빤지 이음매가 그대로 보인다. 첫 컷도 커튼이었다. 얼음이 갈라지고 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두 층에 똑같이 깔리고, 떨어진 삽에 부딪히는 우스꽝스러운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들린다. 재난이 무대 위에서 농담이 되어 있는 동안에도 귀가 긴장을 놓지 못한다.
다 보이는데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 막이 하는 일을 보면 짚인다. 방청석의 인형은 세트를 채우는 더미가 되고, 빙산에 핵을 쏘자는 말은 풍자로 넘어간다. 디거의 가짜 사투리와 늙은 분장도 배우의 과장이 된다. 그런데 이 영화 안에서 연극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핵은 떨어졌고 수십만이 죽었다. 연극이라고 부르면 그 일을 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이 막이 하는 일은 은폐와 다르다. 은폐는 안 보이게 하고 들키면 끝난다. 이 막은 다 보이게 두고 이름만 바꿔 붙인다. 틀린 말을 한 게 아니니 들킬 일도 없다. 그래서 들통난 뒤에도 연극은 그대로 올라가고 객석은 그대로 본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이름을 한 번만 바꿔 붙이지 않는다.
허물
벽에는 박제된 머리들이 있다. 박제는 속을 비우고 모양을 남긴다. 그 집을 세운 돈도 같은 공정에서 나왔다. 땅에 눌린 유기물이 오래 묵어 기름이 되고, 기름은 태울 수 있는 물건이 된다. 접시에 오른 참다랑어는 사시미가 되고, 사냥한 짐승은 벽으로 올라가 장식이 된다. 왕처럼 떠받들리던 고양이 매기도 끝에 가서는 한 줌의 재가 된다. 무엇이 되든 쓸 수 있거나 버릴 수 있는 쪽으로 간다.
빙붕도 마찬가지다. 주디는 오슬로 해안에 올라앉고 녹아서 물이 된다. 러시아 쪽에서 떨어진 더 큰 덩어리를 처음에는 킴벌리(Kimberly)라고 불렀고, 미국이 그것을 크렘리노바(Kremlinova)라고 고쳐 부른다. 얼음은 한 조각도 변하지 않았고 발음만 바뀌었다. 그 이름이 붙고 나서야 때릴 명분이 선다. 그러고 핵이 떨어진다. 가네시 박사가 느려지는 게 아니라 조각난다고 미리 말했고, 얼음은 스무 덩이로 갈라져 밑에 잠겨 있던 핵폐기물과 영구동토층의 바이러스를 함께 풀어 놓는다.
정부가 돌리는 인공지능이 말을 지우기도 한다. 소셜미디어에서 단어를 걷어 내는데, 아무도 열지 않은 그 메일에 적혀 있던 메탄이 먼저 지워지고 빙산과 기후변화가 따라 지워진다.
대통령 컴슨의 몸은 암에서 수술로, 수술에서 죽음으로 간다. 그 자리는 내내 공황 상태이던 부통령 에디에게 넘어가고, 대통령이 된 에디가 처음 하는 일은 디거의 해상 플랫폼에 들어가던 물자와 해군 보호를 끊는 것이다.
고양이 매기는 살아 있는 짐승이 아니다. 퍼페티어가 조종하는 기계다. 그 옆에 누운 쪼글쪼글한 노인은 분장을 한 배우다. 짐승의 모양을 한 기계와 늙은이의 모양을 한 사람이 첫 장면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있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열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기름은 유기물로 되돌아가지 않고 재는 고양이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벽에 사슴 모양이 걸려 있는 동안은 사슴이 없어진 줄을 모른다. 변형되는 현상이 이뤄지는 것은 유사하지만, 결국은 탈피하지 못했다. 탈피는 새 몸이 나오는 일이다. 여기서 나오는 몸은 없다. 바닥에 떨어진 허물을 보고 뱀이 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연극도 그 일이고, 재난은 무대 위에 모양으로만 남아 있다. 디거가 가네시를 전용기에 태운다.
참다랑어
디거가 가네시에게 사시미를 권한다. 가네시는 거절한다. 참다랑어 개체가 97% 줄었는데 이 정부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하지 않아서다. 근거가 정확하고, 그 숫자를 아는 사람은 비행기 안에 그 하나뿐이다.
디거는 그 근거를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이야기를 준다. 이 생선은 일본의 백오십 년 된 가업에서 왔고, 거기서는 물고기를 한 마리씩 손으로 돌본다고 말한다. 지속 가능하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윤리를 다투지 않고 삼킬 수 있게 해 주는 내력만 얹는다.
그다음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해 보라고 한다. 발언권을 먼저 쥐여 준 다음에 접시를 다시 민다. 가네시가 한 점을 집어 먹고, 맛있어한다.
디거는 그 참다랑어가 어디서 왔는지 자기도 모른다고 웃으며 말한다. 그 거짓을 밝힌 사람이 디거 자신이고, 밝혀도 삼킨 것은 돌아 나오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참일 필요가 없었다. 삼킬 때까지만 버티면 됐다.
디거가 가네시에게 발언권을 쥐여 준 것을 유럽의회가 록웰 유나이티드에게 한다. 불러서 증언하게 하고, 가네시가 폭로한 뒤에 그렇게 생긴 자리를 디거가 받는다.
In my shoes
빙붕이 유럽을 치고 난 뒤 미국과 록웰 유나이티드가 유럽의회에 불려 나간다. 가네시가 수십 년의 은폐를 늘어놓는다. 그러고 디거가 일어선다.
연설은 십 분 동안 이어지고 그동안 화면이 한 번도 끊기지 않는다. 카메라가 그를 가운데 두고 느리게 한 바퀴 돈다. 그는 먼저 자기가 했다고 인정한다. 이어서 자기가 선 자리에서는 그게 맞았다고 말한다. 당신들이 요구했고 내가 공급했을 뿐이라고 하고, 자기가 유럽에 판 것을 기름이라 하지 않고 자유라고 한다. 자기가 하지 않았으면 당신들은 그 자유를 쥐어 보지도 못했을 것이고 당신들의 자식 세대는 이제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고도 한다. 무대 위의 창백한 지도자들은 그 말을 받아, 사람들은 지속 불가능한 삶을 누릴 자유를 원한다고 실토한다.
설교적이고 자기만족적이라는 말은 맞다. 이 권력가의 프로파간다를 듣는 것이 너무 싫고, 설득되는 것도 싫다. 그런데 또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분열이 일어난다.
디거는 자기 입장을 말하는 법을 보여 준다. 그 말이 방에 풀리자 남은 사람들도 저마다 제 자리에서 옳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야유를 하고 누군가는 박수를 친다. 그러고 디거가 연설을 끝내고 빠져나가자 남은 사람들이 서로 싸운다. 멱살이 잡히고 몸이 날아가고, 누가 벗어 던진 신발이 사람의 머리에 맞아 피가 터진다. 그는 그 방에 없다. 편이 갈리고 의견이 나뉘는데 맞을 사람은 빠져나갔다.
디거는 단축번호로 대통령을 부른다. 반대편은 제 발에서 신발을 벗어 던진다. 다수가 무지몽매하다고 하기에는 그들에게 힘이 없다.
컴슨은 성경 구절을 들이대는 쪽에 그 책을 내던진다. 히브리인이 쓴 거지 미국인이 쓴 게 아니라고 한다. 그 방에서 미터법은 외국 물건이고, 유럽 사람은 앉아서 오줌 누는 사내아이로 불린다. 얼음이 알래스카로 올라오자 컴슨은 주의를 돌리려고 중국에 핵을 쏘자고 한다. 피해를 셀 때도 부서진 설비와 날아간 돈을 먼저 센다. 죽은 사람은 그 뒤다. 얼음을 크렘리노바라고 고쳐 부른 것도 이 손이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커티스가 그 손을 알아본다. 희극으로 몰아가는 연출을 끝내 못 견디고 무대 위에서 무너진다. 이 연극이 실제로 있었던 일을 왜곡하고, 그 일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축소한다고 고발한다. 연출자 한나가 맞선다. 둘이 부딪는 사이로 제작자 케니가 끼어드는데,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조용히 말하는 사람이 앞의 두 사람을 가라앉힌다.
그러고 커티스는 리허설을 끝까지 마친다. 생선을 먹은 가네시와 같은 동작이다. 고발한 사람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무대 위의 디거는 마지막까지 간다. 개조한 해상 플랫폼에 들어가고 보급이 끊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떠난 직원들이 남은 식량과 금과 배를 들고 가고, 쓸 수 있는 것만 빠져나간다. 세상을 그렇게 다룬 사람이 마지막에 그렇게 다뤄진다. 혼자 남아 착란에 빠진 그가 고양이의 재를 바다에 뿌리고 뛰어내린다.
그 죽음에 객석이 박수를 친다. 죽는 인물에게도 치고 그 인물을 연기한 배우에게도 친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재난을 겪은 쪽이고, 겪은 일을 다시 보려고 표를 끊고 들어왔다. 슬픔을 해소하는 일에 값이 매겨져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값을 치르는 사람은 피해자들이다.
리허설이 도는 동안 사라졌던 커티스의 딸은 살아 있다는 소식이 들어온다. 그러고 극장 관리 측이 바깥이 레벨 4라고 알린다. 공연이 끝났으니 바깥 상황을 안내하는 목소리다. 관객들이 방독 마스크를 쓰고 일어선다.
문이 열리면 물에 잠긴 도시가 있고 드론과 무장한 군인이 그 사이를 돌고 있다. 벽에 순응이 곧 자유라는 문구가 보인다. 카메라는 어두운 객석에서 그 바깥까지 끊지 않고 따라 나간다. 객석과 폐허가 한 화면에 붙어 있다. 연극에는 끝이 있었고 극장 밖에는 없다.
그 스물다섯 해 사이에 바뀐 것이 없지는 않다. 연극은 또 올라가고, 관객은 마스크를 쓰고 나가는 법을 익혔다.
메타모르포제는 탈피로도 읽히고, 변형되는 현상이 서로 닮았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우로보로스는 변형하면서도 결국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순환한다. 이 순환이 누군가에게는 탈피했다는 측면에서 발전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결국 소수 권력의 불순응에 순응하는 다수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