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 2023 · 엄태화
CONCRETE UTOPIA

물에 빠진 사람에게는 사람이 아니라 구명튜브를 던진다. 빠진 사람이 본능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을 누르고 올라오려 하기 때문이다. 구하러 들어간 사람은 그 손에 붙잡히게 되면 같이 가라앉게 된다. 이 영화의 내용들이 그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존 앞에 선 인간의 잔혹함, 그리고 야수성이다.
적자생존은 오랫동안 이루어져 왔다. 일상에서는 경쟁이라는 비폭력적인 수단으로 이뤄지지만, 어쩌면 이 경쟁이라는 개념 역시 거세된 형태의 폭력과 그 궤가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고 이 개념이 심화되면 계급이나 정치적 신념 같은 갈등으로 번지기도 한다.
영화의 황궁아파트에서는 적자생존이 폭력적인 수단으로 이뤄진다. 대지진이 서울을 무너뜨리고 황궁아파트 한 동만 남는다. 주민들은 바깥에서 몰려온 사람들을 내보낼지 말지를 투표로 정한다. 사람이 살겠다고 사람을 가려내는 그 과정이 처연하다.
흑백
투표는 바둑돌을 양말에 넣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외부인과 함께 살기를 원하면 흑돌을, 원하지 않으면 백돌을 넣으라고 한다. 통을 열었을 때 백돌이 압도적이었다. 같은 돌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도 쓰인다. 902호의 원래 주인은 바둑판에 뒤통수를 찍히고, 입에 바둑알이 들어간 채 죽는다.
바둑판에는 흑과 백 말고 다른 색이 없다. 통에 손을 넣는 사람도 둘 중 하나를 쥐어야 하고, 공동경비구역은 없다. 그 판에서 이기려면 집을 더 많이 지어야 한다. 무너진 서울에 하나 남은 그 아파트도 사람들이 둘러싸서 지키는 집이다. 사방이 막힌 돌은 상대가 집어 올려 판 밖에 두는데, 투표가 끝난 뒤 주민들이 바깥 사람들에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비기는 일도 없다. 덤에 반집이 붙어 있어 승부는 반드시 갈린다.
모든 도시가 회색빛으로 점철된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 흑과 백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흑백은 황궁아파트 주민과 외부인일 수도 있고, 주민들 간의 대립일 수도 있다. 방범대를 꾸리는 자리에서조차도 서로가 자가인지 전세인지를 이분법적으로 따진다.
잿더미
지진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그 불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잿더미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바깥에 남은 사람들은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채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사이에서 얼어 죽는다. 그에 반해 황궁아파트의 사람들은 그 불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영화에는 직사광이 없다. 하늘이 분진으로 덮여 해가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자를 만들 수 있는 빛은 사람이 켠 불뿐이다. 외부 탐사를 나가 음식을 수확하고 돌아온 다음 잔치가 열린다. 그 자리의 광원은 바닥에 낮게 깔아 둔 자동차 헤드라이트다.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출 때, 그 아파트에 드리워진 주민들의 춤추는 그림자가 가장 짙었다. 아이러니하게 그 불과 불빛은 그들의 몸을 살리는 동시에, 그것들이 그을린 그들의 그림자들이 일렁이는 모습은 또 다른 불처럼 보였다. 이 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잿더미로 만든다. 그들 대부분은 아파트 밖 사람들의 얼어붙은 주검을 보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무덤덤해졌다.
그렇게 무덤덤해진 사람들은 바깥 사람들을 바퀴벌레라고 부른다. 그 바퀴벌레를 품으려다 걸린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를 200번 복창한다. 사람을 숨긴 행동에 대해 죄를 묻고, 무릎을 꿇리고, 소리치게 한다. 묘한 우월감을 느낀다. 무릎을 꿇은 사람과 그걸 지켜보는 사람 사이에 상하관계가 무의식적으로 자리잡는다.
「아우님 덕분에 지혁이가 살았어.」
이 대사는 너무 잔인하다. 「아우님이 마트 사장님을 죽였어」와 사실 등가다. 참 사람이 간악해서, 자신의 생존에 위협받지 않을 때에는 짐짓 착하고 배려 깊은 척 할 수 있겠으나, 그러지 못할 때에는 비인류적인 선택까지 간다. 거기에는 약간의 광기가 있는데, 윤리 의식이 결여된 생존 본능이 이미 그들에게 스며들여져 있다.
902호
잔치에서 노래를 부른 사람은 영탁이었다. 영탁은 사실 살인자다. 그리고 바퀴벌레이고, 황궁아파트의 시민은 아니었다. 902호를 사려다 사기를 당했고, 사기를 친 쪽이 그 집에 살고 있던 「진짜 영탁」이었다. 지진이 나던 날 그는 그 집에서 사람을 죽이고 이름을 가져간다. 버린 이름은 모세범이었다.
자기 자신의 잘못도 있겠으나, 사기를 당하고 가족을 잃은 피해자이다. 그리고 리더이기도 하다. 어쩌면 택시기사로서는 평생 못 살 아파트에서, 대표가 되어 리더십으로 어떠한 시스템을 만들려 했고, 실제로 그것이 황궁아파트 주민들 간의 체계를 잡는 근간이 되었다.
그는 주민들에게 선택받았다고 말한다. 외부인을 숨겨 준 집의 문에는 빨간 페인트가 칠해진다. 문설주에 피를 발라 둔 집을 지나쳐 간다는 옛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칠해진 문이 지목된다. 그리고 그는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한강을 건너갔다가 공격을 받고 도망쳐 나오면서 그것을 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권력도 사라진다.
그는 그 자신이 바퀴벌레이면서 다른 바퀴벌레를 몰아내는 자리에 서 있었다. 주민이 죽는 장면과 그의 아내가 죽는 장면이 겹쳐 지나가는 데가 있다. 사기를 당하고 가족을 잃었지만 영탁은 죽지 않았다. 공허해졌지만 그럼에도 살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입체적이다. 면죄부를 주지는 못할지언정, 그에게 연민이 들고 일말의 이해심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스테인드글라스
그에게 총을 겨눈 사람은 민성이다. 방범대 반장이 되어 직접 사람을 때리는 데까지 갔던 사람이고, 영탁의 정체가 드러나자 총을 든다. 그러나 쏘지 못한다. 그 멈춤이 그가 신념을 되찾았다는 뜻이다. 잃은 채였다면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아파트를 빠져나온 둘은 반쯤 무너진 성당에서 밤을 보낸다. 날이 밝자 명화가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치는 빛을 보고 예쁘다고 한다. 분진이 해를 지운 뒤로 이 영화에 색이 돌아오는 자리는 거기뿐이다. 민성이 되찾은 신념도 그렇게 돌아왔다. 어쩌면 잿빛으로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 다시 비치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았다. 세상이 무너지고 자원이 한정된 자리에 놓였을 때, 나는 저들처럼 선택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신념을 바꾼 사람들을 욕할 수도 없다.
엔딩 크레딧에 윤수일의 「아파트」가 흐른다.
잔치에서 영탁이 부르던 그 노래인데, 이번에 부르는 사람은 혜원이다.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오늘도 바보처럼 미련 때문에 다시 또 찾아왔지만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가사 속 화자는 기다려 주던 사람이 사라진 아파트로 다시 찾아온다. 그 가사가 어쩌면 영탁이 원했던 유토피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가진 것은 남의 집과 남의 이름이었다.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아들이 바뀐 줄도 모르는 노인이었다. 기저귀를 갈아 주면서 그 자리를 채웠다. 마지막에 그는 902호 거실에서 제 가족사진을 보며 죽는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선택받았다고 말한 사람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들어간 쪽은 그를 따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명화는 무너진 데를 걷다가 사람들을 만나고, 여기 있어도 되느냐고 묻는다. 그냥 살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황궁 아파트는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민성이 죽고 나서야 명화가 그 자리에 닿는다. 어쩌면 유토피아는 거기 있어도 되느냐고 묻지 않아도 되는 자리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