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하나였다. 리베라는 컷패스트볼 하나로 열일곱 해를 버텼고, 타자들은 무엇이 올지 알고도 치지 못했다. 양키스 유니폼만 입은 19년에 652세이브, 아직 누구도 넘어서지 못한 숫자다.
마리아노 리베라 히론은 1969년 파나마시티에서 태어났다. 자란 곳은 거기서 서쪽으로 약 25마일 떨어진 어촌 푸에르토카이미토였다. 바닷가 비포장길 끝의 방 2칸짜리 집에는 수도도 전기도 없었고 함석지붕은 성한 곳이 아니었다. 아버지 마리아노 리베라 팔라시오스는 정어리잡이 배의 선장으로 하루 14시간을 배에서 보냈다. 어머니는 델리아 히론, 위로 누나가 하나 아래로 남동생이 둘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장비를 만들어 썼다. 공은 찢어진 어망을 감아 전기테이프로 묶었고, 배트는 나뭇가지였고, 글러브는 우유팩을 접어 만들었다. 가죽 글러브를 처음 가진 것은 12살 때 아버지가 사다 준 것이다. 먼저 좋아한 운동은 축구였고 좋아한 선수는 펠레였다. 발목과 무릎을 다쳐 축구를 접은 것이 17살이고, 그 뒤로도 야구는 취미에 가까웠다. 16살부터는 아버지 배에서 조업을 배웠고 9학년에 학교를 그만뒀다. 삼촌 미겔이 유압 밧줄에 맞아 숨졌고 본인도 배가 기울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그는 정비공이 될 생각이었다.
파나마 오에스테 바케로스에서는 유격수와 외야수를 봤다. 양키스 스카우트 허브 레이번은 1988년 그를 보고도 빅리거를 떠올리지 못했다. 이듬해 플레이오프 한 경기에서 선발이 무너지자 감독이 그를 마운드로 불렀다. 투수를 해 본 적 없는 선수였는데 그날 한 점도 주지 않고 경기를 끝냈다. 동료 에밀리오 가에스와 클라우디노 에르난데스가 그 얘기를 스카우트 치코 에런에게 전했고, 2주 뒤 파나마시티 트라이아웃에 불려 갔다. 1990년 레이번이 그의 집 거실에서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금은 자료마다 2,000달러, 2,500달러, 3,000달러로 갈린다. 몸무게는 약 155파운드, 구속은 85마일에서 87마일이었다.
프로 첫해 걸프코스트리그에서 52이닝 1자책, 평균자책 0.17을 찍었다. 리그 평균자책 타이틀과 거기 걸린 500달러를 챙기게 하려고 구단이 마지막 경기 선발을 맡겼고, 그는 7이닝 노히터를 던졌다. 1992년 여름 슬라이더를 더 휘게 하려고 손목을 꺾다가 오른쪽 팔꿈치 인대를 다쳤다. 프랭크 조브가 그 팔꿈치를 열었고, 토미 존 수술은 아니었다. 그해 확장 드래프트에 보호받지 못한 채 나왔지만 어느 구단도 그를 뽑지 않았다. 재활하던 1993년에는 양키스에서 던졌던 화이티 포드, 론 기드리와 공을 주고받았고, 그린즈버러의 유격수 데릭 지터가 그의 투구 수를 셌다.
| W | L | ERA | G | GS | CG | SHO | SV | IP | SO | BB | WHIP |
|---|---|---|---|---|---|---|---|---|---|---|---|
| 82 | 60 | 2.21 | 1,115 | 10 | 0 | 0 | 652 | 1283.2 | 1,173 | 286 | 1.000 |
레거시
- 명예의 전당
주요 상
- 올스타 선정×13
- 올해의 구원투수상×5
- 월드시리즈 MVP
- ALCS MVP
- 올스타전 MVP
우승
- 리그 페넌트×7
- 월드시리즈×5
수훈
- 베이브 루스상
- 올해의 재기상
타이틀
- 세이브왕×3
시즌 클럽
- 50세이브 시즌×2
시대의 상
- 더 스포팅 뉴스 올스타
마일스톤
- 199525세NYYDEBUT5–3 · ERA 5.51 · 51 K
선발 투수로 빅리그에 올라왔고, 그 자리가 맞지 않았다. 5월 23일 첫 등판에서 3이닝 3분의 1 동안 5자책을 내줬고 네 번 선발한 뒤 6월에 마이너로 내려갔다. 구단은 선발 데이비드 웰스를 받는 조건으로 그를 디트로이트에 보내는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무렵 컬럼버스에서 비로 5이닝에 끊긴 노히터를 던지는 동안 스피드건이 95마일을 넘겼다. 전해까지 그가 던지던 것보다 6마일쯤 빠른 공이었다. 진 마이클이 기계를 다시 확인하게 한 뒤 트레이드 이야기가 사라졌다. 리베라는 그 구속을 설명한 적이 없다. 신이 준 것이라고만 했다. 19경기 평균자책 5.51로 시즌을 마쳤다. 구단이 그를 남긴 근거는 그 성적이 아니었다. 스피드건이 읽은 수였다.
- 199626세NYYREGULAR8–3 · ERA 2.09 · 130 K · 5 SV리그 페넌트월드시리즈
마무리가 아닌 해에 사이영상 투표 3위를 받았다. 봄에 구단은 유격수 펠릭스 페르민을 받으려고 그를 시애틀에 보내려 했고, 프런트가 조지 스타인브레너를 설득해 신인을 데릭 지터와 함께 남겼다. 그가 맡은 자리는 마무리 존 웨틀랜드 앞의 7회와 8회였다. 그해 양키스는 6회까지 앞선 73경기 중 70경기를 이겼다. 그 70승의 가운데가 그였다. 첫 세이브는 5월에 왔지만 그 시즌의 그는 경기를 끝내는 투수가 아니었고, 투표가 매긴 순위는 그 역할에 주는 것이 아니었다.
Wire photo애틀랜타와의 1996년 월드시리즈 6차전 등판. - 199727세NYYMARQUEE6–4 · ERA 1.88 · 68 K · 43 SV올스타 선정
웨틀랜드를 내보낸 구단이 9회를 그에게 맡겼다. 출발이 나빴다. 처음 여섯 번의 세이브 기회 가운데 세 번을 지키지 못했고, 이 자리가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 토리는 그를 그대로 뒀다. 6월 디트로이트에서 라미로 멘도사와 공을 주고받던 중 포심 패스트볼이 저 혼자 늦게 옆으로 휘기 시작했다. 멜 스토틀마이어와 마이크 보르젤로를 붙들고 며칠을 그 움직임을 없애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쓰기로 했다. 공이 하늘에서 곧장 떨어진 것 같았다고 그는 훗날 썼다. 이 해의 43세이브나 1.88은 그 공이 온 뒤의 숫자다. 재키 로빈슨 50주년으로 등번호 42가 전 구단 영구결번이 된 그 봄, 그 번호를 달고 있어 계속 쓸 수 있었던 13명에 그가 들었다. 클리블랜드와의 디비전시리즈 4차전에서 아웃 네 개를 남기고 샌디 알로마 주니어에게 홈런을 맞았다.

뉴저지 힐사이드의 사인회, 1997년. - 199828세NYYSHORT3–0 · ERA 1.91 · 36 K · 36 SV리그 페넌트월드시리즈
커터가 그가 가장 많이 던지는 공이 됐고, 방망이를 부러뜨리기 시작한 것도 이 해부터다. 봄에 사타구니를 다쳐 2주를 부상자 명단에서 보냈다. 가을에는 13이닝 3분의 1을 무실점으로 막고 여섯 번을 세이브했다. 그중 셋이 샌디에이고와의 월드시리즈였다.
- 199929세NYYREIGN4–3 · ERA 1.83 · 52 K · 45 SV리그 1위세이브베이브 루스상올해의 구원투수상월드시리즈 MVP올스타 선정리그 페넌트월드시리즈세이브왕
구장이 그를 부르는 음악을 정했다. 전광판 쪽 직원들이 메탈리카의 「Enter Sandman」을 골랐고, 그 여름부터 그가 나올 때 그 곡이 울렸다. 그 겨울 그는 4년을 더 던지고 목사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듬해에 그 계획을 놓았다. 한때 세 번을 내리 놓치고 평균자책이 7.84까지 올라갔던 해이기도 하다. 그 뒤 마지막 서른 번의 등판에서 자책점 하나를 줬다. 애틀랜타와의 월드시리즈에서 그는 최우수선수로 뽑혔고, 거기서 올린 두 번째 세이브가 우승을 끝냈다. 중재에서 받은 425만 달러는 전해의 75만 달러에서 올라간 금액이다.
Wire photo애틀랜타를 꺾은 직후, 호르헤 포사다의 품에서. 1999년 월드시리즈. - 200030세NYYMARQUEE7–4 · ERA 2.85 · 58 K · 36 SV올스타 선정리그 페넌트월드시리즈
그해 기록을 셋 넘었다. 7월 8일에는 메츠와의 더블헤더 두 경기를 모두 세이브했다. 한 경기는 셰이스타디움에서, 다음 경기는 양키스타디움에서였다. 포스트시즌 열여섯 번째 세이브로 데니스 에커슬리의 기록을 넘고, 포스트시즌 연속 무실점이 33이닝 3분의 1에서 화이티 포드를 넘어섰다. 메츠와의 월드시리즈를 끝낸 세이브는 그의 월드시리즈 일곱 번째 세이브이자 그때까지 아무도 가진 적 없는 수였다. 중재가 정한 그해 연봉은 725만 달러로, 그가 요구한 925만 달러보다 적었지만 당시 야구에서 가장 큰 중재 금액이었다.
- 200131세NYYMARQUEE4–6 · ERA 2.34 · 83 K · 50 SV리그 1위세이브올해의 구원투수상올스타 선정리그 페넌트세이브왕50세이브 시즌
월드시리즈 7차전을 그가 끝내지 못했다. 9회에 세이브를 놓쳤고, 자기 송구 실책이 거기 얹혔다. 양키스는 그 경기와 우승을 애리조나에 내줬다. 그해 커리어 처음으로 긴 계약을 맺었다. 4년 3,999만 달러였다. 정규시즌에 올린 50세이브는 데이브 리게티의 구단 기록 46을 넘긴 수이고, 한 시즌 50세이브는 야구 역사에서 여섯 번째였다. 그 50개로 7차전의 한 개를 메울 수는 없었다.
Wire photo애리조나와의 2001년 월드시리즈 7차전, 그가 끝내지 못한 경기. - 200232세NYYMARQUEE1–4 · ERA 2.74 · 41 K · 28 SV올스타 선정
몸이 처음으로 그를 놓았다. 6월에 사타구니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일주일 뒤에는 어깨로 다시 올랐다. 코르티손 주사를 맞고 돌아왔지만 또 들어갔다. 7월 14일에는 6자책을 주며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았다. 커리어에서 가장 나쁜 등판 중 하나다. 5월 9일의 225번째 세이브로 리게티를 넘어 구단 통산 1위가 된 것도 이 해인데, 그 기록보다 오래 남은 물음은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였다.
- 200333세NYYSHORT5–2 · ERA 1.66 · 63 K · 40 SVALCS MVP리그 페넌트
그 물음에 겨울로 답했다. 공을 던지는 대신 체력과 근력에 겨울을 썼다. 그러고 스프링캠프에서 사타구니를 다쳤다. 6월 13일에는 로저 클레멘스의 300승을 지키는 세이브를 올렸다. 보스턴과의 챔피언십시리즈 7차전에서는 9회 동점 상황에 올라와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긴 등판이다. 버틸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가 낸 답이 그 3이닝이었다.
Wire photo애런 분의 끝내기 홈런이 나온 뒤, 2003년 챔피언십시리즈 7차전. - 200434세NYYMARQUEE4–2 · ERA 1.94 · 66 K · 53 SV리그 1위세이브올해의 구원투수상올스타 선정세이브왕50세이브 시즌
디비전시리즈가 끝난 뒤 파나마로 날아갔다. 수영장 사고로 숨진 친척 두 사람의 장례였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보스턴과의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을 세이브했다. 그리고 4차전과 5차전을 둘 다 놓쳤다. 4차전에서는 대주자 데이브 로버츠에게 2루를 내줬고 그 주자가 동점 득점이 됐다. 보스턴은 3연패 뒤 4연승으로 올라갔다. 그해 그가 올린 53세이브는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숫자다. 3월에는 2년 2,100만 달러로 계약을 늘렸다. 그 숫자들이 남은 자리에 그 가을의 다섯 경기가 함께 남았다.
Wire photo보스턴을 꺾은 뒤의 리베라, 2004년. - 200535세NYYMARQUEE7–4 · ERA 1.38 · 80 K · 43 SV올해의 구원투수상더 스포팅 뉴스 올스타올스타 선정
펜웨이파크가 그에게 환호했다. 봄에 팔꿈치 관절낭염으로 스프링캠프를 거르고 보스턴을 상대로 첫 두 번의 세이브를 놓쳤다. 보스턴에게 내준 네 번째 연속 실패였다. 그다음 주 펜웨이가 경기 전에 그를 소개하자 관중이 그를 향해 환호를 보냈다. 조롱이었다. 리베라는 모자를 들어 답했다. 그러고 23이닝 연속 무실점과 31연속 세이브 성공을 쌓았고, 평균자책과 볼넷에서 커리어 최고치를 세웠다. 첫 딜리버리맨 상을 받았고 사이영상 투표에서 바톨로 콜론에 이어 2위에 올랐다. 그가 그 투표에서 받은 가장 높은 순위다.
Wire photo펜웨이파크 선수 소개 때 보스턴 관중의 환호를 듣고 있다, 2005년. - 200636세NYYMARQUEE5–5 · ERA 1.80 · 55 K · 34 SV올스타 선정
세이브 목록을 두 칸 올라갔다. 6월 6일의 391번째 세이브로 에커슬리를 넘어 역대 4위가 됐고, 7월 16일에 400세이브에 닿은 네 번째 투수가 됐다. 올스타전에서는 아메리칸리그의 역전승을 지켜 에커슬리의 올스타 3세이브와 나란히 섰다. 시즌 막판 대부분은 던지는 쪽 팔꿈치 염좌로 비웠다.

펜웨이파크에서 보스턴을 상대로. 등 뒤의 42번이 보인다, 2006년 5월. - 200737세NYYSHORT3–4 · ERA 3.15 · 74 K · 30 SV
구단이 봄에 연장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리베라는 시즌이 끝나면 자유계약을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4월에 첫 두 번의 세이브를 놓치고 7이닝 3분의 1 동안 9자책을 줬다. 기자들은 그가 충분히 등판하지 못해서라고 적었다. 그 뒤 다섯 달 동안 서른두 번의 기회에서 서른 번을 지키고 평균자책 2.26을 남겼다. 7월 14일의 425번째 세이브로 존 프랑코를 넘어 역대 3위가 됐다. 겨울에 3년 4,500만 달러로 다시 계약했고, 그 금액은 야구에서 구원투수가 받은 가장 큰 계약이었다.

볼티모어를 상대로 공을 놓는 순간, 2007년. - 200838세NYYMARQUEE6–5 · ERA 1.40 · 77 K · 39 SV올스타 선정
옛 양키스타디움의 마지막 공을 그가 던졌다. 9월 21일 그 구장의 마지막 경기에서 볼티모어의 브라이언 로버츠를 땅볼로 잡은 공이다. 엿새 전에는 479번째 세이브로 리 스미스를 넘어 역대 2위에 올라섰다. 16이닝 연속 무실점과 28연속 세이브 성공으로 시즌을 열었고, 둘 다 그의 개막 최고 기록이다. 그런데 양키스는 그의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가을 야구에서 밀려났다. 시즌이 끝난 뒤 검사에서 던지는 쪽 어깨 관절의 석회화가 나왔고, 겨울에 관절경 수술을 치렀다. 70이닝에 볼넷 6개, 평균자책 1.4를 남겼다. 숫자만 보면 그의 가장 좋은 해다.

캠든야즈 원정 등판, 2008년 8월. - 200939세NYYMARQUEE3–3 · ERA 1.76 · 72 K · 44 SV올해의 구원투수상올스타 선정리그 페넌트월드시리즈
6월 28일 500세이브에 닿은 두 번째 투수가 됐다. 같은 경기에서 그는 타석에도 섰다.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를 상대로 만루에서 볼넷을 골라 타점을 올렸다. 열다섯 해를 던지고 처음 올린 타점이다. 올스타전 세이브는 그의 네 번째였고 그것도 기록이다. 마지막 마흔 번의 등판 가운데 자책점을 준 경기가 둘이고, 서른여섯 번 연속으로 세이브 기회를 지켰다. 필라델피아와의 월드시리즈를 끝내 다섯 번째 우승을 가졌다. 그해 10월 마무리 가운데 패도 블론세이브도 없었던 투수는 그 혼자였다.

볼티모어 원정 경기를 앞두고, 2009년 5월. 
뉴욕 시내에서 열린 2009년 월드시리즈 우승 퍼레이드. - 201040세NYYMARQUEE3–3 · ERA 1.80 · 45 K · 33 SV올스타 선정
지터와 호르헤 포사다와 함께 열여섯 번째 시즌을 같은 팀에서 맞았다. 북미 4대 리그에서 세 선수가 그렇게 한 것은 처음이다. 5월의 블론세이브로 홈 51연속 세이브 성공이 끊겼다. 에릭 가니에의 기록과 나란히 서 있던 수였다. 열한 번째 올스타에 뽑혔지만 복사근과 무릎을 쉬려고 물러났다. 시즌 뒤 자유계약 선수가 됐고 2년 3,000만 달러로 돌아왔다.
- 201141세NYYMARQUEE1–2 · ERA 1.91 · 60 K · 44 SV올스타 선정
트레버 호프먼이 601세이브를 남기고 은퇴하면서 리베라가 현역 1위가 됐고, 기록까지 42개가 남았다. 5월에 1,000경기에 나선 열다섯 번째 투수가 됐고, 한 팀에서만 그렇게 한 투수는 그가 처음이다. 9월 13일 600세이브, 나흘 뒤 601세이브로 호프먼과 나란히 섰다. 9월 19일 양키스타디움에서 미네소타를 6대 4로 꺾으며 그 기록을 넘었다. 마지막 아웃은 크리스 파멜리 삼진이었다. 마흔을 넘긴 투수가 한 시즌 40세이브를 올린 것도 그가 처음이다. 겨울에는 성대의 폴립을 떼어냈다.

캠든야즈 경기 전, 2011년 8월. Newsreel크리스 파멜리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통산 세이브 기록을 넘던 밤. - 201242세NYYSHORT1–1 · ERA 2.16 · 8 K · 5 SV
5월 3일 캔자스시티에서 타격 연습 중 외야에서 플라이를 잡으려 달리다 오른쪽 무릎이 꺾였다. 커리어가 거기서 끝날 수도 있는 부상이었다. 다음 날 그는 이렇게 답했다. 큰 글씨로 적어 두세요. 나는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6월 12일에 무릎을 재건했다. 손상됐다고 본 반월판은 열어 보니 손댈 필요가 없었다. 라파엘 소리아노가 그 자리를 맡아 시즌을 마쳤다. 개막전 세이브를 놓친 뒤 그 뒤 남은 경기에서 8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다섯 번을 세이브한 것이 그해 그가 던진 전부다. 그 겨울 1년 1,000만 달러로 다시 계약했다.

무릎을 다친 해의 팀 사진 촬영일, 양키스타디움 2012년 8월. - 201343세NYYCURTAIN6–2 · ERA 2.11 · 54 K · 44 SV올스타전 MVP올해의 재기상올스타 선정
마지막 시즌을 작별에 썼다. 3월 9일에 그해를 끝으로 은퇴한다고 발표했고, 그 뒤로 방문하는 구단마다 팬들과 만나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아무도 인터뷰하지 않는 직원들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들이 구장을 돌아가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그가 댄 이유였다. 구단마다 그에게 무언가를 줬다. 클리블랜드와 로큰롤 명예의 전당은 「Enter Sandman」의 골드 레코드를 줬고, 미네소타는 다른 것을 준비했다. 시티필드 올스타전에서는 8회에 그 혼자 마운드로 보내졌고, 양 팀이 더그아웃에 남아 구장이 그를 향해 서 있게 했다. 9월 22일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이 마리아노 리베라의 날을 선포한 그 경기 전에 양키스는 50분을 들여 그의 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올렸다. 5월 28일에는 메츠를 상대로 아웃 하나 없이 세이브를 놓치고 패전을 안았다. 그에게 한 번도 없던 일이다. 다큐멘터리 「Being: Mariano」에서 그는 그 긴 작별이 자기를 지치게 했고 9월에는 더 던질 마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9월 26일 탬파베이에 4대 0으로 진 경기가 그의 마지막이었다. 밥 셰퍼드의 녹음된 소개를 들으며 8회에 올라왔다.

시티필드 올스타전 마운드에서 기립 박수에 모자를 벗어 답하고 있다, 2013년. 
영구결번식 날, 가족과 옛 동료들이 기다리는 마운드로 걸어가는 리베라. 2013년 9월 22일. 
마지막 등판에서 교체되는 순간, 데릭 지터의 어깨에 기댄 리베라. 2013년 9월 26일. Newsreel지터와 페티트가 공을 받으러 나온 9회, 마운드에서의 마지막 4분.
저 선수는 더 위의 리그에 있어야 한다, 그런 리그가 있다면. 야구에서 추방해라. 반칙이다.
2019년 미국야구기자협회 투표에서 그는 425표를 전부 받았다. 첫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선수는 지금도 그 혼자다. 파나마 사람으로는 로드 커루에 이어 두 번째였다. 그해 가을 백악관에서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고, 식은 「Enter Sandman」으로 시작됐다. 2014년 메이저리그는 아메리칸리그 올해의 구원투수상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포스트시즌에 남긴 141이닝 평균자책 0.70과 42세이브는 둘 다 기록으로 서 있다. 쿠퍼스타운에는 그의 커터에 부러진 배트가 세워져 있고, 양키스타디움 모뉴먼트 파크에는 그의 동판이 있다.
2009년 그와 아내 클라라는 뉴욕 웨스트체스터에 이글레시아 레푸히오 데 에스페란사를 세웠다. 목회는 클라라가 맡았고 2014년 교인들은 뉴로셸의 고쳐 지은 교회 건물로 옮겼다. 마리아노 리베라 재단은 미국과 파나마의 가난한 가정을 돕는다.
은퇴를 발표하던 날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남을 위해 늘 거기 있던 선수로 기억되면 좋겠다."



- 커터는 포심 패스트볼과 같은 그립으로 던진다. 불펜 포수 마이크 보르젤로의 설명은 이렇다. "그는 포심을 두 손가락을 붙여서 던진다. 손가락 사이에 공간이 거의 없다."
- 톰 버두치는 그가 실밥이 말굽 모양이 되게 쥔다고 적었다. 패스트볼을 쥐는 방식 그대로다.
- 포수 샐 파사노는 리베라가 "홈플레이트를 보고 던진 적이 없다. 타자의 몸 선을 보고 던졌다"고 했다.
- 조 토리가 2007년에 한 말. "어느 순간부터 그를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그를 당연하게 여겨도 된다는 것, 그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전제였다."
- 마이너 시절 동료 마이크 디진이 기억하는 1993년과 1994년의 그. "화내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조용한 자신감이 보였다."
- 컷패스트볼이 메이저리그 전체로 퍼진 것은 그에게서 비롯됐다고 투수들은 말한다.
- 통산 WHIP 1.00은 충분한 이닝을 던진 투수 가운데 라이브볼 시대 최저다.
- 베이스볼 레퍼런스가 계산한 그의 1996년 WAR는 5다. 그 뒤로 한 시즌에 이 숫자에 닿은 구원투수는 없다.
- 1991년 11월 6일 클라라 디아스 차콘과 결혼했다. 아들 셋을 뒀고, 장남 마리아노 3세는 2014년 양키스, 2015년 워싱턴에 지명됐다.
- 자신을 재는 기준을 그는 "주님의 겸손한 종이 되는 것,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도 경기를 하는 일에서도 최선을 다해 바르게 하려 애쓰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