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퍼드 브론은 1935년 12월 30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세 살에 부모가 갈라섰고, 아홉 살에 어머니가 변호사 어빙 코팩스와 재혼하면서 그 성을 받았다. 집안이 그에게 기대한 길은 삼촌들이 간 길, 건축이었다.
동네에서 그는 야구보다 농구로 알려진 아이였다. 라파예트 고교 농구부 주장이었고 디비전 득점 2위였다. 대학도 농구로 갔다. 신시내티 대학 1학년 팀에서 평균 9.7점을 넣는 동안에도 그가 세워 둔 계획은 건축과로 옮기는 쪽이었다. 야구부에 들어간 경위는 좀 우습다. 야구팀도 맡고 있던 에드 저커 감독이 뉴올리언스에서 시작하는 원정 일정을 짜는 것을 엿들었고, 그 도시가 보고 싶어서 "저 투수인데요"라고 말한 뒤 테스트를 통과했다. 한 시즌 동안 32이닝에 삼진 51개와 볼넷 30개를 기록했다.
신문을 돌리며 샌드로트 팀을 맡던 밀트 로리가 그 어깨를 알아보고 투수를 시킨 것이 먼저였고, 스카우트들이 붙은 것은 그다음이었다. 다저스의 알 캄파니스는 에베츠필드 테스트에서 직접 타석에 서 본 뒤 이런 말을 남겼다. "살면서 팔에 털이 곤두선 적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시스티나 성당 천장을 봤을 때고, 다른 한 번은 샌디 코팩스의 패스트볼을 봤을 때다." 1954년 12월 14일, 그는 밀워키의 더 큰 제안을 물리고 고향 팀과 계약했다. 아버지가 협상에서 챙긴 조건은 야구가 안 될 경우 대학을 마칠 수 있는 돈이었다. 그 계약금이 보너스 규정의 기준을 넘긴 탓에 구단은 그를 2년간 빅리그 로스터에 두어야 했고, 그래서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단 하루도 던지지 않았다.
| W | L | ERA | G | GS | CG | SHO | SV | IP | SO | BB | WHIP |
|---|---|---|---|---|---|---|---|---|---|---|---|
| 165 | 87 | 2.76 | 397 | 314 | 137 | 40 | 9 | 2324.1 | 2,396 | 817 | 1.106 |
레거시
- 명예의 전당
주요 상
- 올스타 선정×6
- 사이영상×3
- 월드시리즈 MVP×2
- MVP
우승
- 리그 페넌트×6
- 월드시리즈×4
위업
- 노히터×3
- 퍼펙트게임
수훈
- 베이브 루스상×2
타이틀
- 평균자책점왕×5
- 탈삼진왕×4
- 투수 트리플 크라운×3
- 다승왕×3
시즌 클럽
- 20승 시즌×3
- 300탈삼진 시즌×3
시대의 상
- 더 스포팅 뉴스 올스타×4
- 더 스포팅 뉴스 올해의 선수×4
- 195519세LADDEBUT2–2 · ERA 3.02 · 30 K리그 페넌트월드시리즈
열아홉 살이었고, 마이너리그를 한 번도 거치지 않았다. 보너스 규정이 구단에 그를 빅리그 로스터에 두도록 강제한 탓이었다. 스프링캠프 막바지에 발목을 다쳐 부상자 명단으로 시즌을 열었고, 6월 8일 그를 올리기 위해 구단은 토미 라소다를 몬트리올로 내려보냈다. 올라온 그는 투수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거의 몰랐다. 본인 말로는 이랬다. "내가 아는 사인은 손가락 하나가 패스트볼, 둘이 커브뿐이었는데 여기선 대여섯 개가 있었다." 그해 그가 따낸 승리는 둘, 둘 다 완봉이었다. 브루클린은 그 가을 프랜차이즈 첫 월드시리즈를 가져갔다. 그는 로스터에 이름만 올렸고, 시리즈 마지막 아웃이 잡히자 곧장 컬럼비아의 야간 건축 수업으로 갔다.

에베츠필드 1955년 8월 27일 입장권. 그날 신시내티를 완봉하고 첫 승을 가져갔다. - 195620세LADSHORT2–4 · ERA 4.91 · 30 K리그 페넌트
두 번째 해도 다르지 않았다. 58.2이닝에 평균자책 4.91. 공 두 개가 연달아 빠지면 불펜에서 누군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고 동료 조 피냐타노는 기억했다. 재키 로빈슨과 로이 캄파넬라가 앨스턴 감독에게 따졌다. 재능 있는 투수를 몇 주씩 앉혀 두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던 뉴컴의 훗날 증언에 따르면, 백인 동료 가운데 일부는 그를 따돌리고 유대인을 가리키는 멸칭으로 불렀다. 그때 그의 편에 선 쪽이 흑인 선수들이었다. 그해 팀에 합류한 샐 매글리 옆에서, 그는 던 드라이스데일과 나란히 불펜에 앉아 노련한 투수가 경기를 읽는 법을 들었다.
- 195721세LADREGULAR5–4 · ERA 3.88 · 122 K
겨울에 구단은 그를 푸에르토리코로 보냈다. 카구아스 크리오요스는 다저스를 빼면 그가 유니폼을 입은 유일한 팀이다. 리그가 빅리그 경력자 보유 수를 제한하면서 그는 방출됐고, 그곳에서의 마지막 경기는 안타 두 개짜리 완봉이었다. 두 안타의 주인은 모두 로베르토 클레멘테였다. 돌아온 시즌, 이닝은 처음으로 세 자리가 되었고 삼진은 122개까지 늘었다. 그리고 9월 29일, 그는 브루클린 다저스를 위해 공을 던진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구원 한 이닝이었다. 구단은 그 겨울 서쪽으로 떠났다.
- 195822세LADREGULAR11–11 · ERA 4.48 · 131 K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첫해에 그는 선발 스물여섯 번을 받았다. 그때까지 가장 많은 일감이었다. 11승 11패, 평균자책 4.48, 볼넷 105개. 시즌 내내 등이 아팠는데 원인은 갈비뼈에 생긴 양성 종양이었고 겨울에 수술로 떼어 냈다. 비시즌에는 군 예비역으로 포트딕스에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칼 어스킨에게 야구를 그만두고 라디오 방송국을 사들일 생각이라고 털어놓았다. 한 해만 더 해 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시즌이 끝난 뒤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맞은 첫 개막일. 도열한 선수들 가운데 등번호 32번이 그다. - 195923세LADREGULAR8–6 · ERA 4.05 · 173 K리그 페넌트월드시리즈
5월 2일자 그의 평균자책은 12.27이었다. 그는 다른 구단이 웨이버로 자신을 데려가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적어도 빅리그에는 남을 수 있을 테니까. 투수코치 조 베커가 그 봄의 그를 두고 남긴 말이 있다. "조정력이 하나도 없고 자신감을 다 잃었다. 팔은 멀쩡한데 메커닉이 전부 엉켰다." 그리고 8월 31일, 그는 샌프란시스코 타자 열여덟 명을 삼진으로 잡았다. 밥 펠러가 가진 메이저리그 기록과 같았고, 디지 딘의 내셔널리그 기록은 그날 깨졌다. 시즌 성적은 8승 6패에 평균자책 4.05. 그 두 줄 사이의 거리가 그때 그가 어떤 투수였는지를 말해 준다. 다저스는 그해 월드시리즈를 가져갔다.

1959년 월드시리즈로 떠나는 기내에서. 왼쪽부터 월리 문, 월트 앨스턴 감독, 코팩스. - 196024세LADREGULAR8–13 · ERA 3.91 · 197 K
그는 단장 버지 바바시를 찾아가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던질 기회가 모자란다는 이유였고, 거절당했다. 양키스가 엘스턴 하워드를 걸고 그를 데려가려 한 것도 이 무렵이었는데 바바시는 그쪽도 거절했다. 시즌은 8승 13패로 끝났다. 삼진 197개를 잡는 동안 볼넷 100개를 내줬다. 마지막 경기가 끝난 뒤 그는 장비를 쓰레기통에 넣고 클럽하우스를 나갔다. 야구를 접고 투자해 둔 전자회사로 갈 작정이었다. 관리인 노비 가와노가 그것을 도로 꺼내 두었다. 혹시 그가 돌아올까 해서였다.
- 196125세LADMARQUEE18–13 · ERA 3.52 · 269 K리그 1위탈삼진올스타 선정탈삼진왕
편도 수술을 받고 평소보다 한참 가벼운 몸으로 캠프에 왔다. 빠진 것을 훈련으로 되돌리면서 그는 생애 가장 좋은 몸을 만들었고, 그 뒤로는 해마다 가벼운 채로 캠프에 들어갔다. 스카우트 케니 마이어스가 와인드업의 결함을 짚었다. 너무 깊이 젖히는 바람에 목표를 놓친다고 했다. 그리고 포수 노름 셰리가 한마디를 건넸다. 카운트가 몰리면 그렇게 세게 던지지 마라. 볼넷으로 만루를 채운 뒤 그는 삼자범퇴를 잡았고, 그날 경기를 노히트로 마쳤다. 시즌이 열리자 삼진 269개로 리그 선두에 섰다. 선발 서른다섯 번에 255.2이닝, 둘 다 그때까지 그가 가 본 적 없는 숫자였다. 볼넷은 96개로 내려왔다.

1961년, 연습장에서 공을 놓고 난 직후. 그가 처음으로 리그 삼진 선두에 선 해다. - 196226세LADMARQUEE14–7 · ERA 2.54 · 216 K리그 1위평균자책올스타 선정평균자책점왕노히터
다저스타디움이 문을 열었다. 6월 30일, 신생 뉴욕 메츠는 그에게서 안타 하나를 뽑아내지 못했다. 삼진 13개에 5대 0, 생애 첫 노히터였다. 그런데 그 봄 4월에, 던지는 팔을 보호하려고 좌타석에 들어섰다가 얼 프랜시스의 공에 손을 맞았다. 검지가 저리기 시작하더니 차가워지고 하얗게 변했다. 7월 신시내티전에서 손가락이 갈라졌다. 손바닥의 동맥이 으스러져 있었다. 열흘간의 실험적 투약이 동맥을 다시 열었고, 그 전까지 절단은 가능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였다. 9월에 돌아왔지만 공은 녹슬어 있었다. 자이언츠가 따라붙어 플레이오프가 열렸고, 첫 경기 선발로 나선 그는 2회에 내려왔다. 그해 그의 평균자책 2.54는 리그에서 가장 낮았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다음 다섯 해 동안 한 번도 남의 것이 되지 않았다.

1962년 벨브랜드 다저스 카드 32번. 감자칩 봉지에 들어 있던 지역 한정판이다. - 196327세LADREIGN25–5 · ERA 1.88 · 306 K리그 1위다승탈삼진평균자책베이브 루스상사이영상MVP투수 트리플 크라운더 스포팅 뉴스 올스타더 스포팅 뉴스 올해의 선수월드시리즈 MVP올스타 선정리그 페넌트월드시리즈다승왕탈삼진왕평균자책점왕20승 시즌300탈삼진 시즌노히터
스물일곱의 해에 그는 가질 수 있는 것을 거의 다 가졌다. 25승 5패, 평균자책 1.88, 삼진 306개. 투수 트리플크라운이었다. 완봉 11번은 칼 허벨이 좌완으로 세운 기록을 넘어섰고 아직 깨지지 않았다. 4월 23일 왼 어깨 후방 관절낭을 다쳐 2주를 쉬었고, 돌아온 뒤 5월 11일에는 샌프란시스코를 상대로 두 번째 노히터가 나왔다. 8회 1사까지 퍼펙트였는데 에드 베일리에게 볼넷 하나를 내주며 거기서 끊겼다. 가을에는 양키스를 4연승으로 쓸어버린 월드시리즈에서 1차전과 4차전을 혼자 잡았다. 1차전에서 삼진 15개를 잡으며 칼 어스킨의 시리즈 기록을 깼는데, 나중에 어스킨을 만났을 때 그는 사과를 했다. 리그 MVP와 만장일치 사이영상이 함께 왔다. 그리고 그해가 저물 무렵, 왼 팔꿈치에는 외상성 관절염이 자리를 잡았다. 경기가 끝나면 그 팔은 얼음물 속에 있었다.

공에 2를 적어 들어 보이고 있다. 1963년 5월 11일, 두 번째 노히터를 던진 날. 
1963년 10월 2일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던지는 코팩스. 
우승이 확정된 뒤 끌어안고 춤을 춘 존 로즈보로와 코팩스. Newsreel1963년 월드시리즈 4차전. 그가 양키스를 상대로 시리즈를 끝낸 경기다. - 196428세LADMARQUEE19–5 · ERA 1.74 · 223 K리그 1위평균자책더 스포팅 뉴스 올스타더 스포팅 뉴스 올해의 선수올스타 선정평균자책점왕노히터
MVP를 받은 다음 겨울의 협상은 사나웠다. 그가 7만 5000달러를 부르자 바바시는 6만 5000을 내밀며 이닝이 모자랐다는 말을 꺼냈고, 둘은 7만 달러에 합의했다. 그 직후 한 신문이 그가 9만 달러를 요구하며 은퇴를 들먹였다고 썼다. 사실이 아니었다. 과묵하던 그가 공개적으로 받아쳤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다." 바바시와 오말리를 향한 그의 마음은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마운드에서는 4월 22일 세인트루이스에서 1회에 팔 안쪽이 무언가 풀리는 느낌을 받아 코르티손 주사를 세 대 맞고 세 경기를 걸렀다. 6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는 공 아흔일곱 개로 세 번째 노히터가 나왔다. 그날 타석에 선 상대는 최소 인원인 스물일곱 명뿐이었다. 8월 8일 밀워키에서 견제구에 2루로 귀루하다 팔꿈치로 떨어졌다. 두 경기를 더 이기고 난 아침, 팔꿈치는 무릎만 하게 부어 있었고 팔은 펴지지 않았다. 팀 주치의 로버트 컬런의 진단은 외상성 관절염이었다. 그해 그는 다시 공을 잡지 않았고, 스물아홉 번 나가 19승을 거뒀다.

다저스타디움에서 홈플레이트 쪽으로 내딛는 순간. 하체와 등으로 던지는 투수였다. 
1964년 봄, 앨스턴 감독이 무릎을 꿇고 네 선수를 올려다보고 있다. 왼쪽 끝이 코팩스다. - 196529세LADREIGN26–8 · ERA 2.04 · 382 K리그 1위다승탈삼진평균자책베이브 루스상사이영상투수 트리플 크라운더 스포팅 뉴스 올스타더 스포팅 뉴스 올해의 선수월드시리즈 MVP올스타 선정리그 페넌트월드시리즈다승왕탈삼진왕평균자책점왕20승 시즌300탈삼진 시즌퍼펙트게임
3월 30일 아침, 완투한 다음 날 그는 왼팔 전체가 붓고 피멍으로 검푸르게 변한 것을 보았다. 컬런의 경고는 분명했다. 계속 던지면 언젠가 그 팔을 못 쓰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계속 던지기로 하고 대신 사이드암을 버렸고, 슬라이더를 레퍼토리에서 지웠다. 등판 전에는 선수들이 원자폭탄 연고라 부르던 캡솔린을 팔에 발랐고, 끝나면 고무 소매를 끼고 얼음물에 담갔다. 팔꿈치에 물이 차면 주사기로 뽑아냈다. 밤에는 코데인이 든 진통제를 먹었다. 그런 몸으로 그는 335.2이닝을 던지고 27번을 완투했다. 삼진 382개는 루브 와델이 1904년에 세운 근대 기록을 지웠다. 9월 9일 다저스타디움에서는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스물일곱 명을 차례로 돌려세웠다. 네 번째 노히터이자 퍼펙트게임, 삼진 14개, 1대 0이었다. 10월, 월드시리즈 1차전이 욤키푸르와 겹쳤다. 그는 던지지 않겠다고 했다. "한순간도 고민한 적 없다. 나는 분명히 던지지 않는다." 대신 올라간 드라이스데일은 두들겨 맞고 내려오면서 감독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지금쯤 저도 유대인이었으면 하시겠네요." 7차전 선발은 이틀 쉰 그였다. 커브가 없어 거의 패스트볼만 던지고 완봉했다.

1965년 무렵 배포된 홍보용 사진. Newsreel1965년 9월 9일 퍼펙트게임의 마지막 이닝. 빈 스컬리의 중계가 그대로 실려 있다. - 196630세LADCURTAIN27–9 · ERA 1.73 · 317 K리그 1위다승탈삼진평균자책사이영상투수 트리플 크라운더 스포팅 뉴스 올스타더 스포팅 뉴스 올해의 선수올스타 선정리그 페넌트다승왕탈삼진왕평균자책점왕20승 시즌300탈삼진 시즌
4월에 컬런은 그에게 은퇴를 권했다. 팔이 한 시즌을 더 못 견딘다고 보았다. 그는 그 말을 혼자 가지고 있었다. 이미 전해에 올해를 마지막으로 정해 둔 참이었다. 시즌 전 그와 드라이스데일은 바바시가 둘을 서로에게 맞세워 왔다는 것을 알아채고 함께 버텼다. 변호사를 세우고 3년치를 한 덩어리로 요구한 32일간의 공동 홀드아웃은 선수노조가 생기기 직전의 야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돌아온 그는 선발 마흔한 번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27승 9패, 평균자책 1.73, 삼진 317개. 세 번째 트리플크라운이고 세 번째 만장일치 사이영상이었다. 그 사이 팔은 더 굽었다. 시즌이 끝날 무렵 팔꿈치에는 뼈 조각이 자라 있었고, 그는 팔의 모양이 드러나지 않도록 양복 상의를 몰래 고쳐 입었다. 팔이 짧아지는 것도 느꼈다. 면도할 때 얼굴을 팔 쪽으로 숙여야 했다. 10월 2일 필라델피아,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에서 이틀 쉬고 나가 6대 3으로 완투하며 페넌트를 확정했다. 5회에 허리를 삐끗해 디스크가 밀려났고, 트레이너들과 던 뉴컴이 그를 양쪽에서 잡아당겨 도로 집어넣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승리였다.

1966년 10월 2일 필라델피아 입장권. 그가 마지막으로 이긴 경기의 표다.
스물다섯 번 이긴 건 알겠다. 내가 이해 못 하는 건 다섯 번을 어떻게 졌느냐는 거다.
1966년 11월 18일 베벌리윌셔 호텔, 서른 살의 그는 그만두겠다고 발표했다. "야구가 끝난 뒤에도 살아갈 햇수가 많이 남았고, 나는 그 세월을 내 몸을 온전히 쓰면서 살고 싶다. 지난 열두 해 중 단 1분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한 해가 더 있었다면 그 한 해는 후회할 것 같다." 구단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팀은 일본 순회 중이었고, 발표를 겨울 회의 뒤로 미뤄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바바시는 오지 않는 쪽을 택했다. 며칠 뒤 옛 룸메이트 딕 트레이스키에게 털어놓은 말은 이랬다. "팔이 아직 아프다. 약을 먹어 가며 던지는 짓을 계속할 수는 없다. 그러다 죽는다."
NBC와 10년 계약을 맺고 중계석에 앉았지만 6년 만에 내려왔다. 프로로 야구를 해 본 적 없는 사람과 야구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에게는 어려웠고,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던지는 투수를 설명하는 일도, 함께 뛴 사람을 비판하는 일도 그랬다. 1968년 시즌이 끝나고 구단이 복귀를 공식 제안했을 때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골프 한 라운드도 제대로 못 치는 몸으로 늙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1972년, 자격을 얻은 첫해에 그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서른여섯 살 스무 날, 지금까지 가장 어린 헌액자다. 소식은 메인주의 농장에서 들었다. 수락 연설에서 그는 투수코치 조 베커를 먼저 불렀다. 나를 밀고 떠밀고 창피를 주고 일하게 만든 사람이라고. 그다음에는 자기 공을 받아 준 모든 포수에게 고맙다고 했고,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첫 공을 받은 로이 캄파넬라와 나머지 대부분을 받은 존 로즈보로였다. 같은 해 6월 4일 구단은 그의 32번을 영구결번으로 올렸다. 캄파넬라의 39번, 재키 로빈슨의 42번과 나란히였다.
1979년 그는 마이너리그 투수 인스트럭터로 돌아와 오렐 허샤이저, 데이브 스튜어트, 돈 서턴, 페드로 마르티네스 같은 투수들을 만졌다. 1980년대에 유행하던 스플리터를 가르치기 위해 로저 크레이그의 도움을 받아 자기가 먼저 그 공을 익혔다. 연습장에서 그의 점퍼 등에는 이름이 없었다. 2022년 6월 18일 다저스타디움에 그의 동상이 섰다. 로빈슨의 동상 옆자리다.



- 1955년 봄, 더운 밤에 팀 버스가 건널목에 멈춰 화물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치 빌리 허먼이 짜증을 내며 내뱉었다. "젠장, 이 동네는 유대인들한테 줘 버려도 되겠군." 버스가 조용해졌다. 스무 살이 안 된 코팩스가 나직이 말했다. "빌리, 이미 우리 건데요." 이 이야기를 전한 칼 어스킨은 그걸로 끝이었다고 했다.
- 그는 사실상 두 가지 공으로 던졌다. 포심 패스트볼은 솔기를 당겨 넣은 백스핀 때문에 타자 눈에는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고, 가운뎃손가락으로 돌린 오버핸드 커브는 30센티미터 넘게 수직으로 떨어졌다. 역대 가장 좋은 커브로 꼽는 사람이 많다.
- 슬라이더는 끝내 못 던졌다. 던지면 팔이 아팠다.
- 사인을 흔드는 방식도 연기였다. 평범하게 거절하면 타자에게 정보가 간다고 보고, 몇 개를 연달아 흔든 뒤 처음부터 원하던 공으로 돌아오곤 했다.
- 상대 타선은 불펜에서 몸을 풀기 전까지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늦게 생각해야 그 타자들만 생각하게 된다는 이유였다.
- 그가 잡으려 한 것은 평범한 타자들이었다. 대타자 하나가 서너 번 나가더라도 앞뒤에서 아무도 치지 못하면 점수는 나지 않는다는 계산이었다.
- 그는 타자를 맞히지 않는 투수였고 통산 사구는 열여덟 개였다. 같은 시절 내셔널리그의 다른 대투수 밥 깁슨은 102개를 맞혔다. 그러면서도 그가 한 말은 이랬다. "투구의 기술은 두려움을 심는 것이다."
- 1966년 그는 기자에게 말했다. "나는 매 경기 노히터를 던지러 나간다. 물론 그렇게 될 리 없고, 안타 하나를 맞으면 완봉을 노린다." 한 해 전에는 이런 말도 했다. "그리고 한 점을 주면 1실점 경기를 하고 싶어진다."
- 현역 시절 그는 담배를 피웠지만 담배 광고에 나가지도, 담배를 문 채 사진을 찍히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본다는 이유였다. 주류 광고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 타석에서는 통산 타율 .097이었다. 홈런 두 개는 둘 다 밀워키 카운티스타디움에서, 둘 다 왼손 투수에게서 나왔다.
- 골드글러브는 한 번도 받지 못했다. 1965년에는 실책이 하나도 없었다.
- 왼손 타자 빌 버돈은 통산 타율이 .267인데 코팩스를 상대로는 60타석에서 .404를 쳤다. 반대편 끝에는 어니 뱅크스가 선다. 143타석에서 안타 23개, 삼진 31개였다.
- 어머니는 아들이 자서전을 쓴다는 말을 듣고 초판 한 권을 달라고 했다. 아들에 대해 좀 알아보려고. "너는 나한테 아무것도 말해 준 적이 없잖니."
- 친구들은 그를 유령이라 불렀다. 불쑥 나타났다가 불쑥 사라져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