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의 문이 열리는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고 첫 경기에 나선 것은 1947년 4월 15일이고, 조시 깁슨은 그해 1월 20일 피츠버그의 집에서 서른다섯에 숨을 거뒀다. 석 달이 모자랐다. 2024년 5월 28일 메이저리그가 니그로리그의 기록을 자기 장부에 편입했을 때, 통산 타율의 맨 윗줄에 앉은 이름이 그였다.
조슈아 깁슨은 1911년 12월 21일 조지아주 부에나비스타에서 소작농 마크 깁슨과 낸시 깁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23년 혼자 피츠버그로 올라가 카네기일리노이 제철소에 일자리를 얻었고, 삼 년 동안 고향으로 돈을 부친 끝에 1926년 가족을 북으로 불러들였다. 가족은 플레전트밸리의 스트라우스 스트리트에 집을 얻었다. 아래로 남동생 제리와 여동생이 있었는데, 제리도 뒷날 니그로리그에서 뛰었다. 조지아에서 5학년까지 마친 소년은 피츠버그의 직업학교에서 전기를 배우다 열다섯에 학업을 접고 공기브레이크 공장에 들어갔다. 집을 먹여야 했다. 열여섯 살에는 김벨스 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를 몰면서 그 백화점 아마추어 팀의 3루수로 뛰었는데, 세미프로 크로퍼드를 이끌던 후크스 팅커가 그 경기를 보고 그를 데려갔다. 팅커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행동이 어찌나 어른스러운지, 열여섯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몸이 먼저 눈에 띄는 선수였다. 팅커의 말로는 함석판처럼 다부져서 부딪히면 벽에 부딪힌 것 같았다고 한다. 1928년 헬렌 메이슨을 만나 이듬해 3월 7일 피츠버그의 마케도니아 침례교회에서 결혼했다. 그가 홈스테드 그레이스의 유니폼을 처음 입은 1930년 여름, 그 결혼은 열여덟 달을 채우지 못하고 끝난다.
| G | AB | R | H | 2B | 3B | HR | RBI | SB | BB | AVG | OBP | SLG | OPS |
|---|---|---|---|---|---|---|---|---|---|---|---|---|---|
| 638 | 2,301 | 647 | 856 | 142 | 63 | 176 | 769 | 44 | 357 | .372 | .457 | .718 | 1.175 |
레거시
- 명예의 전당
주요 상
- 올스타 선정×10
우승
- 리그 페넌트×9
- 월드시리즈×2
타이틀
- 홈런왕×12
- 타점왕×9
- 득점왕×6
- 출루율왕×4
- 안타왕×2
- 타격왕
- 193018세MRS · HGDEBUT.378 · 9 HR · 37 RBI · OPS 1.110
열여덟 살의 여름에 두 가지 일이 있었다. 7월 31일 홈스테드 그레이스의 유니폼을 입었고, 8월 11일 아내 헬렌이 쌍둥이를 낳다 세상을 떠났다. 아이들의 이름은 조시 주니어와 헬렌이었고, 외가가 길렀다. 그레이스로 오기 전에는 펜실베이니아 스크랜턴에서 멤피스 레드삭스의 경기에 한 번 나섰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포수가 손가락을 다친 밤에 구단주 컴 포지가 그를 관중석에서 불러냈다고 하는데, 어디에나 실려 있는 그 대목은 확인된 적이 없다. 남은 서른세 경기에서 타율 .378에 홈런 아홉 개를 쳤다. 9월 27일 뉴욕 링컨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양키스타디움 좌측 관중석에 공을 꽂았는데, 430피트에서 460피트 사이로 추정됐다. 열여덟 살이 친 공이었다.
- 193119세HGINDEPENDENT.311 · 8 HR · 42 RBI · OPS .923
두 번째 해는 조용했다. 마흔여덟 경기에 나서 타율 .311, 홈런 여덟 개. 그레이스는 그해도 리그 밖에 있었다. 리그를 삼키기 직전의 스무 살이었다.

1930~31년의 홈스테드 그레이스. 니그로리그 역사상 최강 팀으로 꼽히는 얼굴들이다 - 193220세PCINDEPENDENT.328 · 9 HR · 47 RBI · OPS .944
거스 그린리가 돈을 들여 프로 구단으로 키운 피츠버그 크로퍼드로 옮겼다. 그해 크로퍼드는 어느 리그에도 속하지 않았다. 봄에 출범한 이스트-웨스트 리그가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져, 흑인 야구가 통째로 리그 없이 한 해를 보낸 것이다. 예순네 경기에서 타율 .328에 홈런 아홉 개를 치고도 그는 아무 타이틀도 받지 못했다. 리그가 없었으니 타이틀도 없었다.

1932년 봄의 피츠버그 크로퍼드. 사첼 페이지와 오스카 찰스턴이 같은 줄에 서 있다 - 193321세PCREIGN.395 · 20 HR · 79 RBI · OPS 1.191리그 1위홈런타점안타타율OBP올스타 선정리그 페넌트홈런왕타점왕안타왕타격왕출루율왕
스물한 살에 타율 .395, 홈런 20개, 타점 79개. 타격·홈런·타점·안타를 한꺼번에 쓸어 담은 유일한 해다. 니그로리그 올스타전인 이스트-웨스트 게임에도 처음 뽑혔고, 이후 아홉 번을 더 그 자리에 선다. 크로퍼드는 새로 세운 니그로 내셔널리그의 첫 페넌트를 가져갔다. 그리고 이 해부터 그는 리그에서 온전히 뛴 모든 해에 홈런왕이 된다.
- 193422세PCREIGN.310 · 15 HR · 59 RBI · OPS .992리그 1위홈런타점득점올스타 선정홈런왕타점왕득점왕
홈런·타점·득점 세 부문의 맨 위에 그의 이름이 앉았다.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의 잭 마셜은 이 해에 깁슨이 양키스타디움 밖으로 공을 완전히 넘기는 걸 봤다고 말했다. 활자로도 필름으로도 남은 것이 없고, 정작 깁슨 자신은 평생 그 이야기를 부인했다. 가운데 담장 안쪽 불펜까지 갔을 뿐이라고 했다.
- 193523세PCREIGN.369 · 10 HR · 58 RBI · OPS 1.097리그 1위홈런타점올스타 선정리그 페넌트홈런왕타점왕
출전이 마흔일곱 경기로 줄었다. 그런데도 홈런 열 개와 타점 쉰여덟 개로 두 부문을 다시 이끌었고, 타율은 .369였다. 크로퍼드는 그해 페넌트의 주인이었다.
- 193624세PCREIGN.396 · 19 HR · 71 RBI · OPS 1.270리그 1위홈런타점득점올스타 선정홈런왕타점왕득점왕
크로퍼드에서의 다섯 해가 이 해로 끝난다. 타율 .396에 홈런 19개, 타점 71개를 치고 홈런·타점·득점 세 자리를 다시 차지했다. 스물넷이었다.

1936년 8월 23일 시카고 코미스키 파크, 네 번째 이스트-웨스트 게임 - 193725세HGREIGN.421 · 21 HR · 80 RBI · OPS 1.485리그 1위홈런타점득점리그 페넌트홈런왕타점왕득점왕
그레이스로 돌아온 해에 타율 .421을 쳤다. 마흔한 경기에서 홈런 21개와 타점 80개. 같은 해 그는 도미니카의 시우다드 트루히요로 떠나기도 했는데, 라파엘 트루히요의 구단이 니그로리그 스타들에게 돈을 얹어 불렀기 때문이다. 디지 딘은 피츠버그 쿠리어의 웬델 스미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깁슨은 공을 받아 본 포수 중에 최고 축에 든다. 저 투수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라. 그리고 세상에, 저 방망이를 봐라."
- 193826세HGREIGN.368 · 13 HR · 58 RBI · OPS 1.166리그 1위홈런타점득점리그 페넌트홈런왕타점왕득점왕
그레이스는 페넌트를 지켰다. 깁슨은 쉰 경기에서 타율 .368에 홈런 13개, 타점 58개를 쳤고, 홈런·타점·득점에서 다시 리그 선두였다.
- 193927세HGMARQUEE.398 · 12 HR · 42 RBI · OPS 1.298리그 1위홈런올스타 선정홈런왕
스물아홉 경기밖에 뛰지 않았는데 타율 .398을 쳤고, 리그에서 그보다 홈런을 많이 친 사람은 없었다. 열두 개였다. 미국에서의 시즌은 이 해가 한동안 마지막이 된다.
- 194028세HGSHORT.167 · 1 HR · 2 RBI · OPS 1.111리그 페넌트
멕시코가 그를 불렀다. 흑인 선수에게 돈을 더 주고, 호텔과 식당을 가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레이스에서 두 경기를 뛰고 베라크루스와 계약했다. 그가 빠진 그레이스는 그해도 리그를 이겼고, 그의 이름은 페넌트 팀 명단에 두 경기만큼 남았다.
- 194129세ELSEWHERE
니그로리그의 기록에는 이 해가 없다. 한 해를 통째로 베라크루스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 194230세HGREIGN.340 · 14 HR · 66 RBI · OPS 1.090리그 1위홈런타점득점OBP올스타 선정리그 페넌트홈런왕타점왕득점왕출루율왕
서른 살에 그레이스로 돌아왔다. 팀은 피츠버그와 함께 워싱턴의 그리피스 스타디움을 홈으로 썼다. 예순두 경기에서 타율 .340, 홈런 14개, 타점 66개를 치고 홈런·타점·득점 세 부문을 도로 가져왔다.
- 194331세HGREIGN.466 · 20 HR · 112 RBI · OPS 1.435리그 1위홈런타점득점안타OBP올스타 선정리그 페넌트월드시리즈홈런왕타점왕득점왕안타왕출루율왕
1월 1일 집에서 발작을 일으켜 의식을 잃었다. 열흘간의 입원 끝에 의사들은 뇌종양을 찾아냈고, 그는 수술을 거부했다. 신문에는 신경쇠약으로 실렸다. 진짜 병명을 알리지 않은 채로 그는 커리어에서 가장 좋은 해를 보냈다. 타율 .466, 홈런 20개, 타점 112개에 홈런·타점·득점·안타 선두. 그해 그리피스 스타디움의 좌측과 중견 담장을 넘긴 횟수가 아메리칸리그 전체보다 많았다. 아버지 마크 깁슨이 세상을 떠난 것도 이 해다. 팀은 니그로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니그로 월드시리즈를 가져간 1943년의 그레이스. 쿨 파파 벨이 뒷줄에 함께 있다 - 194432세HGREIGN.333 · 10 HR · 50 RBI · OPS 1.020리그 1위홈런타점올스타 선정리그 페넌트월드시리즈홈런왕타점왕
그레이스가 니그로 월드시리즈를 연달아 가져갔고, 깁슨은 홈런 열 개와 타점 쉰 개로 두 부문의 선두에 섰다. 같은 해 그는 워싱턴의 갤린저 병원에 정신 관찰로 입원했다. 두통은 멎지 않았다.
- 194533세HGREIGN.348 · 8 HR · 40 RBI · OPS 1.055리그 1위홈런OBP올스타 선정리그 페넌트홈런왕출루율왕
몸이 무거워지고 행동이 종잡을 수 없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홈런왕 자리는 내주지 않았다. 마흔일곱 경기에서 타율 .348, 홈런 여덟 개.
- 194634세HGCURTAIN.316 · 13 HR · 52 RBI · OPS 1.020리그 1위홈런올스타 선정홈런왕
마지막 시즌에도 홈런을 가장 많이 쳤다. 마흔여덟 경기, 타율 .316, 홈런 13개. 그해에 양키스타디움에서 440피트, 피츠버그에서 457피트, 세인트루이스 스포츠먼스 파크에서 500피트짜리가 나왔고, 필라델피아 시브파크에서는 지붕을 넘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은 여전히 멀리 갔고 타점은 쉰두 개에서 멈췄다. 서른네 살이었고, 그는 다음 시즌을 보지 못한다.
어느 빅리그 구단이라도 20만 달러를 주고 데려가고 싶어 할 포수가 있다. 이름은 깁슨이다. 못 하는 것이 없다. 공을 1마일씩 날리고, 흔들의자에 앉은 것처럼 편하게 받고, 어깨는 소총이다. 안타깝게도 이 깁슨은 유색인이다.
1947년 1월 20일 새벽 1시 20분, 그는 집에서 의식을 잃었다. 십 분 뒤 잠시 정신이 돌아왔고, 그리고 숨을 거뒀다. 사인은 뇌졸중으로 기록되었다. 장례식장에 사흘, 장모 마거릿 메이슨의 집에 사흘을 누워 있다가 마케도니아 침례교회에서 장례를 치렀다. 열여덟 해 전 헬렌과 결혼한 바로 그 교회였다. 조문객이 반 마일 넘게 줄을 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해는 피츠버그 로렌스빌의 앨러게니 묘지에 묻혔는데, 그 무덤에는 1975년 명판이 놓이기 전까지 아무 표식도 없었다.
1972년 명예의 전당이 그를 불렀다. 사첼 페이지에 이어 두 번째로 선택된 니그로리거였고, 벅 레너드가 같은 해에 함께 들어갔다. 명판에는 십칠 년 동안 리그와 독립 경기를 통틀어 800개에 가까운 홈런을 쳤다고 적혔다. 그의 아들 조시 깁슨 주니어는 1949년과 1950년에 아버지가 뛰던 홈스테드 그레이스에서 선수로 뛰었다. 아버지가 열여덟 살에 처음 유니폼을 입은 팀이다.

- 그의 이름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이야기, 양키스타디움 담장을 완전히 넘겼다는 홈런을 정작 본인은 부인했다. 가운데 담장 안쪽 불펜까지 갔을 뿐이라고 했다.
- 함께 뛴 테드 페이지는 이렇게 말했다. "성격을 흠잡을 사람은 없었다. 치는 것 다음으로 좋아한 게 아이스크림이었을 것이다."
- 포수로서의 평가는 갈렸다. 비즈 매키나 브루스 페트웨이보다 아래로 보는 이들이 있었고, 로이 캄파넬라는 "내가 본 최고의 포수일 뿐 아니라 최고의 야구선수"라고 했다.
- 몬티 어빈의 말. "윌리 메이스와 함께 뛰었고 행크 애런을 상대해 봤다. 대단한 선수들이었지만 조시 깁슨은 아니었다."
- 래리 도비는 1945년과 1946년의 최고 흑인 선수로 그를 꼽으면서, 일찍 죽은 이유가 상심이었을 거라고 했다.
- 아들은 그 해석을 거부했다. "아버지가 상심으로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화가 난다. 그건 우리 아버지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을 붙들고 곱씹는 사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