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컴과 마리

Malcolm & Marie · 샘 러바인슨 · 2021

“Love deuces all”

4.0 / 5.0·젠데이아 · 존 데이비드 워싱턴·2026.07.28

한 감독이 자기 영화의 시사회에서 막 돌아온 밤이다. 그는 들떠 있고, 같이 사는 여자는 그 들뜸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이 밤을 끝까지 떠나지 않는다. 한 공간에 두 사람이 있고, 몇 시간 동안 가벼운 실랑이들이 새벽까지 여러 라운드로 거듭된다.

그 밤을 이루는 재료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비다. 두 사람은 밤새 어긋나고, 그 어긋남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흑과 백

필름 자체가 흑과 백이다. 그것도 거친 흑백이라, 아무 일 없는 순간에도 화면의 입자가 잘게 끓는다. 매 순간 새 알갱이가 뿌려져 한 프레임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화면이 이미 불안정하고, 그 불안정이 시종일관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을 함의한다.

그 흑과 백 위에서 모든 것이 둘로 갈린다. 남자와 여자. 카메라를 든 자와 그 앞에 선 자. 컷 없이 길게 이어지는 화면 안에서 한 사람은 앉을 때 다른 한 사람은 서기도 하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경우도 빈번하다. 물리적으로는 한 공간에 있는데 마음은 계속 엇갈린다. 흑과 백은 필름의 질감만이 아니다. 두 사람이 벌이는 예술과 비평 다툼의 밑바닥에도 그 대립이 깔려 있다. 검정과 흰색이 끝내 회색으로 섞이지 않듯, 이 대비들도 한 자리로 모이지 않는다.

두 사람이 밤새 붙들고 늘어지는 말조차 그렇게 갈린다. 인정이라는 단어를 둘은 정반대로 서로에게 사용하길 요구한다. 마리는 알아봐 달라고, 자기 삶이 저 영화의 재료였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한다. 맬컴은 반대편에서, 당신은 불안정하니 그 자체를 그냥 인정하라고 한다. 한쪽은 채워서 메우려는 인정이고, 한쪽은 비어 있음을 시인하라는 인정이다. 둘 다 옳아서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 이 말마저 회색이 되지 않는다.

사포질

두 사람이 하는 일은 서로를 문지르는 것에 가깝다. 필름 그레인의 그 거친 분자들, 매끄럽게 녹지 않는 알갱이들이 사실 이 영화를 대변한다. 두 사람은 꼭 그렇게 서로를 긁는다.

사포질은 이상한 동작이다. 긁어서 아프게 깎아 내면서, 동시에 그렇게 깎여야 모난 데가 떨어지고 형태가 잡힌다. 정확히 아픈 데를 문지르는데, 그 정확함은 상대를 속속들이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대를 아는 앎이 상대를 정확히 아프게도 한다. 그래서 최고와 최악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래알 같은 말로 생채기를 내고, 같은 손으로 그 생채기를 어루만진다.

거칠어서 상처가 나지만, 거칠어야 서로의 살갗을 느낀다. 영화 속에서 여러 번 나오는 사랑한다는 말이 면피로 들리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상처를 내면서도 놓지 않는 사랑이니, 맬컴이 말하는 조건 없는 사랑도 이해가 간다. 이 문지름이 두 사람을 다듬는 것인지 닳려 없애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사랑한다.

하나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회색으로 섞이지 않던 그 두 극이, 실은 하나로 붙어 있다. 이긴다는 것이 제 반쪽을 눕히는 일이 되니, 애초에 이길 수가 없다. 밤새 서로가 서로를 상처주고, 상처줄 때마다 서로가 아프다.

그 거친 알갱이들이 끝내 서로 녹아들지 않으면서도 모여 하나의 상을 이루는데, 그 상은 한 순간도 멈춰 있지 못한다. 두 사람이 이룬 하나의 자아가 꼭 그 모양이다. 완성된 적 없고, 부글거리고, 그래서 살아 있다. 섞이지 않은 채 공존한다.

불완전

사랑에 관한 영화인가. 사랑 이야기인 것은 맞다. 다만 이 영화가 사랑 하나만을 말하는지는 끝까지 닫히지 않는다. 감독이 상반된 두 페르소나를 세워 예술을 논하는 것도 같고, 그 둘이 사랑을 이루는 것도 같아서, 어느 쪽이라고 잘라 말할 수가 없다. 어느 쪽이든, 둘이 결국 하나라는 것만은 같다.

사랑은 두 사람이 무언가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자아로 붙어 버리는 일이다. 그렇게 이루어진 하나조차 온전하지 않다. 사랑은 비긴 채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