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 기예르모 델 토로 · 2025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

Alone again, Naturally.

4.5 / 5.0
오스카 아이작 · 제이콥 엘로디 · 미아 고스
2026 · 07 · 22

델 토로는 오래전부터 괴물을 전형적인 괴물로 다루지 않았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비늘 돋친 존재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상대였고, 「판의 미로」에서 가장 잔혹한 얼굴은 괴물이 아니라 멀쩡한 군인의 것이었다. 그의 영화에서 흉한 쪽은 대체로 더 다정하다.

이런 시선이 델 토로만의 것은 아니다. 「페니 드레드풀」의 크리처는 스스로 ‘존 클레어’라는 시인의 이름을 골라 시를 외웠고, 「경계선」의 티나는 흉한 얼굴 아래 사람보다 사람다운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이 계보에서 괴물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한 여림이 걸친 얼굴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한 물음이 따라온다.

괴물

태어난 괴물은 누구도 해치려 하지 않는다. 처음 본 빛에 손을 뻗고, 처음 들은 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그 마음에 폭력을 처음 새긴 쪽은 그를 세상에 내놓고 등을 돌린 사람들이었다. 쫓기고 맞고 버려지는 동안, 괴물은 미움을 배운다. 그가 끝내 누군가를 해친다면, 그건 배운 것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밀렵을 하고 전쟁을 벌이는 자들의 얼굴에는 흉터도 볼트도 없다. 흉한 것은 죽은 조각을 이어 붙인 그 몸뿐이지만, 정작 아무도 해치지 않은 쪽도 그다. ‘괴물’이라는 말은 그렇게 자꾸 반대편으로 미끄러진다.

프랑켄슈타인

레오폴드가 빅터를 대하던 방식은, 빅터가 괴물을 대하는 방식과 겹친다. 억압하고, 고립시키고, 이름 한 번 다정하게 부르지 않는다. 빅터는 아버지에게 받은 것을 제 손으로 만든 생명에게 그대로 물려준다. 상처는 피가 아니라 방식으로 유전된다.

그러고 보면 그 괴물이야말로 프랑켄슈타인이다. 빅터의 아들이니까. 세상이 오해로 갖다 붙였다는 이름은 처음부터 그의 것이었다. 빅터가 내주지 않았을 뿐이다.

다만 둘의 출발은 정반대다. 빅터는 부족할 것 없이 자라고도 뒤틀린 집착에 스스로를 갈아 넣었고, 괴물은 아무것도 없이 버려지고도 혼자 말을 익히고 누군가와 이어지길 바랐다. 가진 쪽은 괴물이 되어 갔고, 빼앗긴 쪽은 사람이 되어 갔다.

가둠

이 영화는 가둠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빙하에 얼어붙은 선함, 쇠사슬에 묶인 몸, 창살 안에서 날개를 파닥이는 나비. 매독으로 시한부가 된 하를란더, 결혼이라는 틀로 걸어 들어가려는 엘리자베스, 이미 그 틀에 갇힌 어머니 클레르. 클레르와 엘리자베스는 같은 배우, 같은 얼굴이다. 결혼은 세대를 건너 같은 얼굴을 다시 가둔다.

구속은 형태가 하나인데 얼굴이 둘이다. 어떤 벽은 밀어내려 서 있고, 어떤 벽은 감싸 안으려 서 있다. 하나는 고립이고, 하나는 보호다.

숲속 오두막이 그 경계에 놓인다. 다른 공간이 사람을 가두는 동안, 오두막은 사람을 머물게 했다. 갈 데 없는 자가 남아도 되는 자리, 그것이 집이다.

가장 넓은 곳이 가장 지독한 감옥이었다. 빙하는 사방이 트여도 유배지고, 오두막은 좁아도 쫓기지 않는 자리다. 트여 있어도 소속이 없으면 추방이고, 갇혀 있어도 소속이 있으면 집이 된다.

울타리

순수하던 그가 인간 틈에 섞이며 처음 한 일이, 가축 울타리를 세우는 것이었다. 창살 밖으로 내몰리던 자가 이제 창살을 짓는 쪽에 선다. 사람으로 산다는 건 무언가를 조금씩 가두는 일에 가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울타리는 가두는 동시에 지킨다. 돌봄에는 늘 얼마간의 구속이 섞여 있다.

실낙원

그를 껍데기가 아니라 마음으로 본 사람은 둘이었다. 엘리자베스, 그리고 눈먼 노인. 세상이 눈으로 그를 가두는 동안,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만 그를 가두지 않았다. 노인은 그를 괴물이 아니라 벗으로 대했다. 그 곁에서 괴물은 처음으로 숨을 쉰다.

노인이 마지막으로 청한 책은 「실낙원」이었다. 잃어버린 낙원. 괴물은 그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낙원을 꿈꾼다. 그리고 곧 그 낙원을 잃는다. 책에서 한 번, 삶에서 한 번. 곁에 벗이 있었다는 것을, 그 자리가 낙원이었다는 것을, 괴물은 잃고 나서야 안다.

이름

낙원을 잃은 괴물이 빅터에게 다가간다. 복수가 아니었다. 사랑을 달라고, 이름을 불러 달라고 조르는 몸짓이었다. 빅터가 평생 아버지와 세상에 바라던 것과 같은 몸짓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같은 허기를 지닌 같은 존재였다.

빅터가 숨을 거둘 때, 이름을 받아 본 적 없는 쪽이 먼저 상대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용서한다. 평생 움켜쥐기만 하던 아버지에게, 아들은 마지막으로 내어 준다. 괴물은 얼음에 갇힌 배를 밀어 사람들을 놓아준다. 갇혀 보고, 안겨 보고, 남을 가둬도 본 존재가 마지막엔 묶인 것을 푼다.

부서진 채로

빅터에게도 하를란더에게도, 영화 속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출구가 있다. 아들 프랑켄슈타인에게만 그 문이 없다. 하를란더가 그토록 갈망하던 영생이, 그에게는 풀리지 않는 사슬이 된다. 불사는 자유가 아니라 감옥이 된다.

배에서 내린 그는 홀로 남아 해를 본다. 희망찬 내일의 해가 아니다.
Alone again, Naturally.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