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차마 들여다보지 못하는 두려움이 하나쯤 있다. 대개는 그것을 감춰 두고, 없는 척 살아간다. 「배트맨 비긴즈」는 그 두려움을 덮는 대신, 얼굴에 뒤집어쓴 사람의 이야기다.
어린 브루스는 우물에 떨어져 박쥐 떼에 덮인다. 그 밤의 두려움 때문에 오페라장을 빠져나가자 조르고, 그 골목에서 부모가 눈앞에서 총에 맞는다. 그때부터 두려움은 그에게 죄책감과 뗄 수 없는 것이 된다.
박쥐
두려움을 다루는 방법은 둘이다. 피하거나, 뒤집어쓰거나. 브루스는 세계를 떠돌다 그림자 결사대에서 두 번째를 배운다. 박쥐 공포를 억누르는 대신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법을 익힌다.
돌아와 그가 고른 것은 더 센 인간이 아니라 상징이다. 사람은 무시당하고 부서지지만, 상징은 부패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이긴 두려움을 골라 남에게 되돌려준다. 상처였던 것이 무기가 된다. 같은 박쥐가 보는 사람에 따라 갈린다. 쫓는 자에게는 공포이고, 쫓기던 약한 자에게는 그 공포가 안전이 된다.
그림자
융은 우리가 밀어낸 어두운 쪽을 그림자(shadow)라 불렀다. 억누르면 사람을 삼키고, 끌어안으면 힘이 된다. 브루스는 끌어안는 쪽에 선다. 다만 품는다고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범죄자에게서 본 포식성과 분노를 이제 제 몸에 걸치고 다닌다. 크레인은 그 반대편의 거울이다. 같은 공포를 무기로 쓰되, 남의 두려움을 억지로 끄집어내 부순다. 그러나 둘 다 사람을 공포로 다룬다는 점에서는 같은 연장을 쥐고 있다. 브루스는 제 그림자를 품고, 크레인은 남의 그림자를 터뜨린다.
정의
브루스는 처음에 복수와 정의를 헷갈린다. 부모를 죽인 자를 제 손으로 쏘려 하고, 레이첼은 그 앞에서 선을 긋는다. 복수는 나를 달래는 일이고, 정의는 균형을 세우는 일이다. 그가 그 선을 처음으로 지키는 것은, 두카르가 살인자를 처형하라 할 때다. 나는 처형자가 아니다 (I'm no executioner). 복수 대신 정의를, 라스 대신 제 길을 고르는 순간이다.
다만 그가 선 자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는 사람을 죽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법 안에 있지도 않다. 법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스스로 공포가 되어 도시를 붙드는 쪽을 택한 사람이다. 라스가 썩은 도시를 태워 없애려 한다면, 브루스는 그 도시를 끝까지 지키려 한다. 지향은 정반대인데, 둘 다 제도 바깥에서 제 손으로 나섰다는 점만은 닮아 있다. 그를 라스에게서 갈라 놓는 것은 거창한 신념이 아니라, 어디서 멈추느냐 하는 얇은 선 하나다. 브루스는 그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쓰고, 그것을 지키는 일은 늘 아슬아슬하다.
저택
스승이 그림자가 되어 돌아온 밤, 라스는 웨인 저택에 불을 지른다. 무너진 브루스를 일으키며 알프레드가 되묻는다.
Why do we fall, sir?
So that we can learn to pick ourselves up.
브루스는 그 저택을 벽돌 하나까지 그대로 다시 세우겠다고 한다. 태워 없애는 대신 되살리는 것, 갈아엎지 않고 본래대로 돌려놓는 것 — 그가 고담에 걸어 보려는 것의 사적인 판본이다. 불탄 자리에 주춧돌부터 다시 놓는 일은 저택 한 채로 끝나지 않는다. 그 첫 주춧돌 위로 앞으로 고담을 떠받칠 것들이 하나씩 얹히기 시작한다.
다만 겉이 그대로일 뿐 그 아래는 달라졌다. 지상의 저택은 변함없는 웨인의 얼굴이고, 그 아래 동굴은 새로 끌어안은 배트맨이다.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지 않고 온전해지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