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역사상 가장 비싼 카드에 박힌 얼굴은, 그것을 세상에서 거둬들이려 한 바로 그 선수의 것이다. 1909년 한 담배 회사가 찍은 카드를 호너스 와그너는 회수시켰고, 살아남은 몇 장은 한 세기 뒤 수백만 달러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전설로 세운 것은 카드가 아니었다. 유격수로 보낸 스물한 시즌이 그를 명예의 전당으로 데려갔다. 1936년 명예의 전당이 처음으로 문을 열던 해, 다섯 명의 첫 헌액자 가운데 내야를 지킨 이름은 그 하나뿐이었다. 한 세기가 지나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격수'라는 자리엔 좀처럼 다른 이름이 앉지 않는다.
요하네스 페터 와그너는 1874년 2월 24일, 피츠버그 인근의 탄광촌 채티어스에서 독일 이민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이었다. 열두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와 형들을 따라 갱으로 내려가 하루 2톤씩 석탄을 날랐다. 어머니는 그를 '한스'라 불렀고, 그 이름이 뭉개져 '호너스'가 되었다. 갱도조차 야구를 그에게서 떼어놓지는 못했다. 형들이 공과 글러브를 들고 갱도로 내려와, 점심시간이면 와그너 형제들이 갱 속에서 공을 주고받았다. 형제 중 셋이 프로 선수가 되었고, 그중 형 앨버트 '버츠' 와그너가 집안 최고의 야구선수로 꼽히며 어린 호너스에게 모든 포지션의 기본기를 가르쳤다.
스타답지 않은 몸이었다. 5피트 11인치에 200파운드, 술통 같은 가슴과 거대한 어깨, 우락부락한 팔에 눈에 띄게 휜 다리. 손은 어찌나 컸던지 글러브를 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고, 그는 글러브 손바닥에 구멍을 내고 속을 뜯어낸 채 공을 잡았다. 그런 몸으로 놀랄 만큼 빨랐던 터라 사람들은 그를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The Flying Dutchman)이라 불렀다. 독일계를 가리키는 'Deutsch'를 네덜란드인을 뜻하는 'Dutch'로 잘못 옮긴 말장난에,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제목을 함께 얹은 별명이었다. 애틀랜틱리그 패터슨의 구단주 겸 감독이던 에드 배로가 1896년 웨스트버지니아 휠링에서 그를 발견해 자기 팀으로 데려왔고, 이듬해 그를 루이빌에 넘기면서 와그너는 빅리그에 올라섰다.
| G | AB | R | H | 2B | 3B | H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
| 2,794 | 10,439 | 1,739 | 3,420 | 643 | 252 | 101 | 1,733 | 723 | 963 | 735 | .328 | .391 | .467 | .858 |
레거시
- 명예의 전당
우승
- 리그 페넌트×4
- 월드시리즈
위업
- 사이클링히트
타이틀
- 타격왕×8
- 타점왕×5
- 도루왕×5
- 출루율왕×4
- 득점왕×2
- 안타왕×2
시즌 클럽
- 200안타 시즌×2
시대의 상
- 베이스볼 매거진 올스타×6
마일스톤
- 189723세LOUDEBUT.335 · 2 HR · 39 RBI · OPS .843
스물세 살의 신인이 7월 19일 루이빌 콜로넬스 유니폼을 입고 빅리그에 데뷔했다. 첫해 62경기에서 타율 .335를 치며 안타 81개를 뽑아냈다. 펜실베이니아 탄광에서 석탄을 나르던 손이 방망이를 쥐자, 리그는 머지않아 이 사내의 이름을 외우게 된다.
- 189824세LOUREGULAR.299 · 10 HR · 105 RBI · OPS .751
- 189925세LOUREGULAR.341 · 7 HR · 114 RBI · OPS .896
루이빌은 내셔널리그가 열두 팀에서 여덟 팀으로 줄어드는 정리 속에 문을 닫았다. 콜로넬스의 구단주 바니 드레이퍼스가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지분까지 사들이면서, 와그너를 비롯한 주축들이 통째로 피츠버그로 옮겨졌다. 떠나는 해에도 그는 타율 .341에 안타 196개를 남겼으니, 이제 그가 향할 곳만 정해지면 그만이었다.
- 190026세PITMARQUEE.381 · 4 HR · 100 RBI · OPS 1.007리그 1위타율타격왕200안타 시즌
피츠버그에서의 첫해, 와그너의 방망이는 곧장 만개했다. 타율 .381에 장타율 .573. 그 자신도 끝내 다시 넘지 못한 커리어 최고치였고, 생애 첫 타격왕이 그 위에 얹혔다. 데드볼 시대의 내셔널리그가 누구의 것이 될지는, 이 한 해로 사실상 판가름이 났다.
- 190127세PITREIGN.353 · 6 HR · 126 RBI · OPS .911리그 1위타점도루리그 페넌트타점왕도루왕
이듬해 그는 타점(126)과 도루(49)로 리그를 이끌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새로 생긴 아메리칸리그의 클라크 그리피스가 내민 선불 20,000달러를 그는 드레이퍼스와 피츠버그에 대한 의리로 뿌리쳤다고 한다. 다만 이 일화는 출처가 분명치 않다.
- 190228세PITREIGN.330 · 3 HR · 91 RBI · OPS .857리그 1위타점득점도루리그 페넌트타점왕득점왕도루왕
1902년의 피츠버그는 103승 36패, 2위를 27.5경기 차로 따돌린 괴물이었다. 와그너는 장타율·2루타·도루·득점·타점까지 다섯 부문에서 리그를 이끌며 그 폭주의 심장에 있었다.
- 190329세PITMARQUEE.355 · 5 HR · 101 RBI · OPS .932리그 1위타율리그 페넌트타격왕
파이리츠는 리그를 제패하고 시즌 타율 .355를 남겼지만, 최초의 현대 월드시리즈에서 와그너의 방망이는 무너졌다. 첫 네 경기를 14타수 5안타 3타점으로 버티다 남은 네 경기에서 14타수 1안타로 완전히 멎었고, 시리즈는 그가 선 채로 삼진을 당하며 끝났다. 보스턴 팬들은 '호너스, 호너스, 왜 그렇게 못 치나' 하고 조롱가를 불렀고, 큰 무대에서 겁을 먹은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까지 따라붙었다. 그 야유는 오래도록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유격수의 낮은 수비 자세, 1903년 - 190430세PITREIGN.349 · 4 HR · 75 RBI · OPS .943리그 1위도루타율OBP도루왕타격왕출루율왕
보스턴의 야유를 등에 짊어진 채 맞은 이듬해, 그는 방망이로 답했다. 타격왕에 도루왕까지 함께 가져가며, 큰 무대에서 겁을 먹었다던 수군거림을 스스로 지워냈다.
- 190531세PITREGULAR.363 · 6 HR · 101 RBI · OPS .932
9월, 와그너는 힐러리치 앤 브래즈비와 계약을 맺고 선수의 사인이 새겨진 최초의 방망이, 루이빌 슬러거를 남겼다. 상업 제품에 이름을 빌려준 최초의 프로 선수라는 이야기가 여기서 시작된다.
- 190632세PITREIGN.339 · 2 HR · 71 RBI · OPS .875리그 1위득점타율득점왕타격왕
이번엔 득점과 타율에서 리그 정상에 섰다. 서른을 넘긴 나이가 그를 끌어내리려던 첫 시도는, 그렇게 아무 일도 아닌 듯 밀려났다.
- 190733세PITREIGN.350 · 6 HR · 82 RBI · OPS .921리그 1위도루타율OBP도루왕타격왕출루율왕
시즌이 끝나자 와그너는 은퇴를 흘렸다. 아마도 연봉 협상의 수였을 것이다. 드레이퍼스는 그의 연봉을 10,000달러로 두 배 올려 답했고, 그는 한동안 리그에서 가장 많이 받는 선수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그해에도 도루왕과 타격왕은 그의 몫이었다.
- 190834세PITREIGN.354 · 10 HR · 109 RBI · OPS .957리그 1위타점안타도루타율OBP베이스볼 매거진 올스타타점왕안타왕도루왕타격왕출루율왕200안타 시즌
서른넷, 방망이는 저무는 대신 절정으로 치달았다. 타점·안타·도루·타율 네 부문을 휩쓴 그해, 훗날의 계산은 그의 공격 생산성(.878)을 이후 한 세기 가까이 내셔널리그에서 다시 나오지 않은 수치로 매겼다.

폴로 그라운즈 타석의 와그너. 뒤로 심판 행크 오데이와 포수 브레스너핸이 섰다, 1908년 9월 - 190935세PITREIGN.339 · 5 HR · 100 RBI · OPS .909리그 1위타점타율OBP베이스볼 매거진 올스타리그 페넌트월드시리즈타점왕타격왕출루율왕
두 개의 전설이 겹친 해다. 아메리칸 토바코가 담뱃갑에 그의 카드(T206)를 끼워 넣자 와그너는 이를 회수시켰다. 아이들이 자기 얼굴을 얻겠다고 담배를 사야 하는 걸 원치 않았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전해진다. 구단 직원이 그의 사진을 10달러에 넘긴 걸 알고는, 그 10달러를 제 주머니에서 물어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회수된 카드는 훗날 수집계에서 가장 유명한 희귀품으로 남는다. 그라운드에서는 또 한 번 타격왕에 오르며 팀을 월드시리즈로 이끌었고, 디트로이트와 타이 콥을 상대한 그 무대에서 콥을 타율 .333 대 .231로, 도루 6 대 2로 눌렀다. 그 6도루는 훗날 루 브록이 넘어설 때까지 단일 월드시리즈 최다 기록으로 남았다.

와그너가 회수시킨 그 카드, T206 (1909~11) 
1909년 월드시리즈, 디트로이트의 타이 콥과 나란히 선 와그너 - 191036세PITMARQUEE.320 · 4 HR · 81 RBI · OPS .822리그 1위안타베이스볼 매거진 올스타안타왕
성적이 처지자 구단은 부상이니 감기니 하는 이유를 댔다. 타율 .320은 1898년 이래 가장 낮은 숫자였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안타 178개로 리그 공동 선두였다. 진짜 이유는 한참 뒤에야 드러난다. 통제를 잃은 음주였다. 퇴장과 출장 정지, 동료와의 충돌이 이어진 끝에야 감독 프레드 클라크가 시즌이 끝나고 그를 붙들고 앉혔다. 인자한 노장이라는 초상 뒤에, 좀처럼 입에 오르지 않는 얼굴이다.

카메라 앞에서 타격 그립을 잡아 보이는 와그너, 1910년 - 191137세PITMARQUEE.334 · 9 HR · 89 RBI · OPS .930리그 1위타율베이스볼 매거진 올스타타격왕
와그너는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타격왕에 올랐다. 서른일곱의 유격수가 여전히 리그에서 방망이를 가장 잘 다루는 사내였다.

밴 존슨 파크에서 타격하는 와그너, 1911년 - 191238세PITMARQUEE.324 · 7 HR · 102 RBI · OPS .891리그 1위타점베이스볼 매거진 올스타타점왕사이클링히트
102타점으로 리그 타점왕에 다시 올랐다. 웬만한 유격수라면 기량이 허물어졌을 서른여덟에, 세월은 아직 그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파이리츠의 와그너와 마이크 돈린, 프레드 클라크 감독, 마티 오툴, 1912년 - 191339세PITREGULAR.300 · 3 HR · 56 RBI · OPS .734베이스볼 매거진 올스타
처음으로 쇠락이 눈에 들어온 해였다. 타율은 .300으로 내려앉았고, 안타도 124개에 그쳤다. 서른아홉, 마침내 세월이 그를 붙들기 시작했다.
- 191440세PITREGULAR.252 · 1 HR · 50 RBI · OPS .634
마흔 살에 통산 3000번째 안타를 쳤다. 필라델피아의 어스킨 메이어를 상대로 뽑은 2루타였고, 캡 앤슨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였다. 타율은 .252까지 떨어졌어도, 그날 베이커 볼의 관중은 늙은 유격수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 191541세PITREGULAR.274 · 6 HR · 78 RBI · OPS .747
은퇴를 입에 올릴 나이였지만, 그는 156경기 전부에 나서 2루타 32개, 3루타 17개, 78타점을 쓸어 담았다. 마흔하나가 남긴 성적표라기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숫자였다. 7월 29일 브루클린을 상대로는 만루홈런까지 넘겼는데, 당시로선 최고령 만루홈런으로 여겨졌다.
- 191642세PITREGULAR.287 · 1 HR · 39 RBI · OPS .720
그해 마지막 날, 와그너는 베시 베인 스미스와 결혼했다. 파이리츠가 6위로 처지고 오랜 감독 프레드 클라크가 물러나자 구단은 그에게 지휘봉을 권했지만, 그는 사양했다.
- 191743세PITCURTAIN.265 · 0 HR · 24 RBI · OPS .641
마지막 시즌은 순탄치 않았다. 연봉 분쟁으로 개막을 놓쳤고, 7월엔 케이시 스텡글의 스파이크에 발목을 찍혔다. 타율 .313을 치던 방망이는 상처가 곪는 사이 .265까지 주저앉았다. 6월 말엔 꼴찌로 처진 팀의 임시 감독을 잠깐 맡았지만, 나흘, 다섯 경기 만에 내려놓았다. 바닥권 팀의 책임을 지면서 선수까지 뛸 수는 없다고 했다. 9월 17일, 2루수로 3이닝을 뛰고 그는 그라운드를 떠났다. 데드볼 시대를 대표하던 유격수의 스물한 해가 그렇게 저물었다.
내가 상대해 본 타자 가운데, 약점을 찾을 수 없는 유일한 선수였다.
선수 유니폼을 벗은 뒤에도 와그너는 오래도록 파이리츠 곁에 남았다. 1933년부터는 타격 코치로 돌아와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아키 본과 랄프 카이너를 길러냈다. 딸들을 어디든 데리고 다니며 공을 가르쳤고, 그 딸들을 '내 사내아이들'이라 불렀다. 1955년 4월, 포브스 필드 앞에 그의 10피트짜리 청동상이 세워지던 날, 그는 차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창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6일, 여든하나의 나이로 카네기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그가 세운 내셔널리그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은 스탠 뮤지얼이 넘어서기까지 45년을 버텼다. 훗날 빌 제임스는 그를 두고 '내가 야구팀에 가장 데려오고 싶은 단 한 명의 선수'라고 적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언제나 효과적이었다.

- 40온스가 넘는 방망이를 두 손을 몇 인치 벌려 잡았다. 이 스플릿 그립 덕에 바깥쪽 공은 마지막 순간 우측으로 밀어치고, 몸쪽 공은 손을 붙여 좌측 라인으로 끌어당겼다.
- 넓은 수비 범위에 반사신경이 빼어났지만, 가까운 송구를 앞두고 유독 발을 오래 고르는 버릇이 있었다. 감독 프레드 클라크가 지적하자 와그너는 "주자를 못 잡게 되면 고치겠다"고 했다 한다.
- 봄 훈련을 싫어했다. 원칙을 내세워 거의 해마다 홀드아웃을 걸거나, 어떻게든 합류를 늦췄다.
- 오프시즌엔 낚시와 사냥을 즐기고 동네 팀에서 농구를 했다. 살이 잘 붙는 체질이라 몸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몇 번의 사고에도 '자동차 몰기'를 즐겼고, 닭을 길렀다.
- 씹는담배와 시가는 즐겼지만 유독 궐련은 싫어했다. 자신이 담배 카드에서 얼굴을 거둬들인 데엔 이 취향도 전부는 아니어도 한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