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 2024 · 오쿠야마 요시유키

엣 더 벤치

「At the Bench」(2024) 포스터

가장 보통의 플레이리스트

감독
오쿠야마 요시유키
출연
히로세 스즈 · 나카노 타이가 · 카미키 류노스케
2026.08.20

도쿄 강가 둔치의 너른 공원, 그 한구석의 작은 벤치 하나에 분홍 화살표가 꽂힌다. 수많은 풍경 가운데 왜 하필 저 벤치일까. 카메라는 늘 벤치의 등 뒤에 앉아, 거기 앉은 사람들의 뒤통수 너머로 오가는 이야기를 곁에서 훔쳐듣는다. 대단한 사건은 없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안부를 나누고, 헤어질까 말까를 저울질하고,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린다. 그런 하루들이 그 자리를 스쳐 간다.

「시시콜콜한 이야기」

별것 아닌 말들이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콩나물 마트'와 바로 옆 슈퍼를 두고 이야기하며 즐거워하고, 어디선가는 정년퇴직을 앞둔 부장의 이야기가 오가고, 또 어느 벤치에는 오토바이도 없으면서 바이크 패션을 걸친 남자친구를 못마땅해하는 커플이 앉아 있다. 하나같이 대단할 게 없는데, 벤치 등 뒤에 앉아 듣고 있으면 자꾸 귀가 머문다. 남의 하루를 몰래 엿보는 재미란 원래 이렇게 사소한 데서 온다.

그 엿듣기를 대놓고 하는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도 있다. 헤어질까 말까 재는 연인 곁에, 초밥을 사 온 아저씨가 슬그머니 끼어 앉는다. 서로에게 쌓인 자잘한 불만이 접시 위에 초밥처럼 한 점씩 쌓인다. 회전초밥이면 한 바퀴 돌고 사라지기라도 할 텐데, 이 접시는 그저 쌓이기만 한다. 그러자 아저씨가 그 초밥을 대신 먹겠다고 나선다. 남이 삼키지 못해 남긴 이야기를 지나가던 사람이 대신 삼켜 줄 때, 그 자리의 공기가 조금 풀린다. 엿듣기는 가끔 남의 체증을 대신 내려 주는 일이 되기도 한다.

「봄여름가을겨울」

벤치는 그렇게 흘러간 순간들을 오래 붙들고 앉아 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 어느 자매의 이야기에서, 언니는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남자를, 그가 한 번 앉았던 벤치를 지키는 일로 붙든다. 관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쉽사리 미워하지 못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자리를 지키기로 한다. 가망 없는 마음 하나가 계절을 통째로 끌어안고 앉은 셈이다. 처음엔 언니의 미련한 고집에 소리를 지르던 동생도 이내 곁에 앉는다. 벤치를 지키는 일이 곧 언니를 지키는 일이라는 걸 알아서다.

시간을 건너 자리를 지키는 건 언니만이 아니다. 벤치가 된 아버지에게 아들이 100년 뒤에 뵈어요 하고 인사할 때, 그 물건은 한 세기가 지나도 변함없이 거기 있을 것만 같다. 오랜 친구였던 노리와 리코가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어 가는 긴 시간도, 결국 같은 벤치가 말없이 품는다. 무언가를 떠나보내지 않으려는 마음은 대개 한자리를 지키며 곁을 내주는 일로 드러난다. 사철이 지나도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끝내 웃는다.

「숨」

오래 한자리에 머물다 보면, 벤치는 제 위를 지나간 사람들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다. 누군가를 안다는 건 결국 그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는 뜻일 텐데, 우리는 스쳐 지나는 이들의 사연을 거의 모른 채 그들을 안다고 여긴다. 정작 '콩나물 마트'를 두고 웃던 하루도,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던 계절도, 헤어질까 망설이던 저녁도 빠짐없이 들은 쪽은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던 벤치다.

영화는 그 물건에 짓궂게 숨을 불어넣어 이 생각을 농담처럼 굴린다. 철거를 앞둔 벤치를 두고 티격태격하던 말이 어느새 외계인의 대화가 되고, 이 벤치가 실은 아버지였다는 데까지 간다.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부터가 진짜인지 흐릿한 채로, 말없던 물건이 을 얻는다. 그러자 벤치는 제 곁을 거쳐 간 그 모든 하루를 낱낱이 기억하는 존재가 된다. 사람을 가장 잘 아는 자리에 사람이 아닌 것이 앉아 있다는 건, 생각할수록 쓸쓸하고 다정하다.

「Good Goodbye」

그 쓸쓸함은 나쁘지만은 않다. 사라져서 슬픈 건, 그것이 그만큼 소중했다는 뜻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처음의 두 사람에게로 돌아와 그 말을 조용히 건넨다. 한 해쯤 지나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가 된 둘은 이번에도 시시한 말을 나눈다. 18년을 산다는 토끼, 그 토끼가 제 것이 되면 어깨가 무겁겠다는 농담.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사라져서 슬퍼지는 감정도 실은 기쁜 일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볼 때, 봉지에 과자가 딱 하나 남았을 때의 그 아쉬움. 짙을수록 그건 그만큼 아꼈다는 증거다.

그래서 이 영화의 이별들은 대체로 기분이 좋다. 공원이 사라진 자리에 벤치가 남고, 벤치가 철거되어도 그 위의 사연은 어딘가에 스민다. 그렇게 흩어진 하루들은 벤치에, 그리고 그 등 뒤에서 곁귀로 듣던 우리에게 고스란히 옮겨 앉는다. 벤치에 걸터앉아 누군가의 하루를 한 곡씩 듣고 나면, 손에 남는 건 가장 보통의 플레이리스트다. 닳아도 계속되고, 사라져도 남는다.